나는 왜 이제야 십자가를 이해하게 되었나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 있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말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모두가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 명제가 내게는 100% 와닿지 않았었다.
올해도 부활절이 돌아왔다. 그런데 이번 부활절에는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내러티브(narrative)'를 드디어 발견하게 되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의 회심 사건, 그리고 그의 저작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음미하며 십자가 사건이 비로소 내 삶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독일의 평범한 청년이었던 몰트만은 17세에 징집되어 제2차 세계 대전의 참혹한 전선으로 내던져졌다. 1943년 함부르크 공습 때는 바로 곁에 있던 전우가 폭격에 맞아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그때부터 가지게 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왜 그는 죽고 나는 살았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과 생존자의 죄책감은 그를 계속 짓눌렀다. 전쟁 말기, 영국군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그는 자살을 결심할 만큼 깊은 허무와 어둠 속에 침전되어 있었다.
희망이 전무하던 그곳에서 한 영국군 군목이 그에게 성경 한 권을 건넸다. 처음에는 그저 추위를 이겨낼 난방용 불쏘시개로 쓸 생각이었다. 그러나 종이를 찢으려던 찰나, 운명처럼 한 성경 구절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 마태복음 27장 46절
순간 몰트만은 전율했다. 십자가 위에서 내뱉으신 예수님의 절규가 바로 지금 수용소 철창 안에서 자신이 내뱉고 싶었던 절망의 비명과 완벽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예수님은 더 이상 하늘 보좌에 앉아 심판이나 내리는 먼 존재가 아니었다. 자신처럼 버림받고, 자신처럼 굶주리며, 자신처럼 죽음의 문턱에서 울부짖는 ‘고통의 동료’였다.
그는 훗날 이 경험을 두고 “내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찾으셨다”고 고백했다. 신이 인간의 고통 바깥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한복판으로 직접 걸어 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는 죽음의 유혹을 떨치고 처음으로 다시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독일로 돌아온 그는 신학을 공부하며 세계적인 석학으로 성장했다. 그의 대표작이자 현대 신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대한기독교서회 역간)은 바로 ‘고통당하는 신’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하나님을 고통을 면제하거나 가하는 존재가 아닌, 고통의 한복판에 함께 서 계시는 ‘동참자’로 선언한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아들의 절규와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고통이 교차한다고 말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받기로 선택하신 하나님은 십자가로 고통의 가장 깊은 밑바닥까지 내려오셨다. 몰트만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고통의 장소는 없다”고 단호히 말한다. 우리가 심지어 신에게 버림받았다고 느낄 때도 우리는 버림받음을 직접 경험해 본 하나님 안에 여전히 머물게 될 수 있다.
이러한 몰트만의 통찰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비극을 15세 소년의 눈으로 기록한 엘리 위젤(Elie Wiesel)의 저서 『나이트(Night)』(민음사 역간) 속 한 장면과도 깊게 공명된다. 수용소 밤의 싸늘한 공기 속에서, 한 소년이 교수대에 매달린 채 몸무게가 너무 가벼워 즉사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모두가 그 처참한 장면을 숨죽여 지켜보던 그때, 누군가 절규하듯 울부짖었다.
그때 위젤의 내면에서는 이런 답이 들려왔다.
신도 우리처럼 눈물을 흘리신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은 총 세 번 등장한다. 그중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며 흘리신 눈물은 요한복음 11장 35절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영어로는 ‘Jesus wept’라고 단 두 단어로 표현되며, 성경 전체에서 가장 짧은 구절로 알려져 있다.
처음 이 구절을 읽었을 때, 나는 예수님이 우시는 이유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수님은 스스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것을 100% 알고 계셨고, 기적을 베푸시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해피엔딩의 결말을 아는 예수님이 왜 그토록 슬프게 우신 것일까?
그 이유를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 속에서 함께 아파하고 공감해 주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고통의 ‘바깥’에서 구경하시는 분이 아니다.
나사로의 부활 이야기에서 주목할 또 다른 지점은 예수님의 ‘지체함’이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곧장 달려가지 않으시고, 오히려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셨다(요한복음 11:6). 결국 예수님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부패가 이미 시작된 상태였다.
여기서 ‘나흘’이라는 시간은 유대 전통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어서 사흘 동안은 영혼이 몸 주변을 떠돌며 다시 돌아올 기회를 엿본다고 믿었었다. 그러나 나흘이 되면 영혼은 몸을 완전히 떠나 누구도 돌이킬 수 없는 ‘완전한 죽음’에 이른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완전한 절망의 시점을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온전하게 드러날 ‘최적의 시점’으로 택하셨다.
우리는 고통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울부짖을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십자가를 쳐다봐야 한다. 우리와 함께 눈물 흘리며 그 시간을 견뎌주고 계시는 신의 모습을.
우리는 이 고통을 빨리 끝내달라고 신을 재촉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통이 끝나는 시점은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는(로마서 8장 28절)' 하나님의 완벽한 섭리 안에서 결정됨을 인정해야 한다.
당신의 고통에 하나님이 오늘도 침묵하신다면, 그 침묵은 부재의 침묵이 아니라 고통의 한복판에 함께 머무르는 '임재의 침묵'임을 기억하자. 그리고 절망에 머물지 말자.
몰트만은 절망과 희망을 이렇게 정의했다.
절망은 “여기까지(독어: Bis hierher)”의 선을 긋는 유혹으로, 희망은 “아직 아니다(독어: Noch nicht)”라는 열린 가능성으로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