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중 가장 어두운 88편
성경 전체에서 가장 어두운 문장은 무엇일까.
많은 신학자는 시편 88편의 마지막 구절을 꼽는다.
시편은 오늘날의 찬송가처럼 예루살렘 성전에서 악기 반주에 맞춰 예배 시간에 불렸던 찬양 노래들의 모음집이다. 시편 속에는 기쁨과 찬양, 슬픔과 탄원, 감사와 고백 등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느낄 수 있는 거의 모든 감정의 팔레트가 다 담겨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 가장 많은 편수는 기쁨과 찬양보다 슬픔과 탄원을 담은 시다.
탄식시는 보통 이렇게 진행된다. 시편 기자가 자신의 고통을 먼저 격렬하게 쏟아낸다.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왜 이러십니까?” 하다가도, 어느 순간 결정적인 전환이 일어난다. “그러나 나는 주를 믿사오리니…”
어둠 속에서도 희망의 불꽃이 마지막에는 켜지는 것이다. 거의 모든 탄식시는 이렇게 ‘탄원에서 찬양으로’의 반전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직접 인용해서 더 유명해진 시편 22편도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처절한 절망으로 시작하지만, 결국은 찬양과 고백으로 끝을 맺는다.
시편 88편 (공동번역)
야훼, 나의 구원자이신 하느님, 낮에도 당신을 부르며 울부짖고 밤에도 당신 앞에 서 있습니다.
나의 기도가 당신 앞에 이르게 하소서.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여 주소서.
나의 영혼은 재난에 휩싸였고 나의 목숨은 이미 저승의 문턱에 다다랐습니다.
나는 구덩이에 떨어진 자처럼 되었고 기운이 다 빠진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나는 죽은 자들 사이에 버려진 몸, 무덤에 누워 있는 시체와 같이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다시는 기억해 주지 않는 자, 당신의 보살핌에서 끊어진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당신께서는 나를 깊은 구렁에, 어둡고 깊은 밑바닥에 던져 넣으셨습니다.
당신의 노여움은 나를 억누르시고 당신의 거센 파도는 나를 덮칩니다.
당신께서는 내가 아는 자들을 멀리 떼어 놓으시고 나를 그들의 역겨운 물건으로 만드셨습니다.
갇힌 몸이라 빠져나갈 길 없는데 고통 속에 내 눈은 흐려졌습니다.
야훼여, 매일같이 당신을 부르며 당신을 향해 두 손을 들고 빌었습니다.
당신께서는 죽은 자들에게 기적을 보여 주시렵니까?
혼령들이 일어나 당신을 찬양하겠습니까?
무덤에서 당신의 사랑이 전해지겠습니까?
멸망의 구렁에서 당신의 성실함이 전해지겠습니까?
흑암 속에서 당신의 기적이 알려지겠습니까?
모든 것이 잊혀진 땅에서 당신의 정의가 알려지겠습니까?
야훼여, 나는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아침마다 당신께 기도를 올립니다.
야훼여, 어찌하여 나를 내버리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외면하십니까?
나는 어려서부터 고생하며 죽을 고비를 겪어 왔습니다.
당신의 무서운 벌을 받아 기진맥진하였습니다.
당신의 노여움이 나를 휩쓸어 가고 당신의 공포가 나를 전율케 합니다.
그것들이 날마다 물처럼 나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나를 조여듭니다.
당신께서는 사랑하는 사람과 벗들을 내게서 떼어 놓으시고 오직 어둠만이 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소망 없는, 극도로 어두운 시편이 정경에 포함되어 있는 것일까.
성경 정경의 편집자들은 수많은 시편 중에서 무엇을 넣고 무엇을 뺄지를 신중히 결정했을 텐데, 시편 88편은 이 선택에서 신기하게 살아남았다.
구약 신학자 클라우스 베스터만(Claus Westermann)은 현대 기독교가 너무 빨리 ‘감사’와 ‘찬양’으로 넘어가려 한다고 지적하며, 시편 88편은 현대인들에게 ‘슬퍼할 권리’를 되찾아준다고 말한다. 치유와 회복을 위해서는 반드시 충분히 머물러야 하는 어둠이 존재하는데, 이 어둠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하나님 앞에 쏟아놓는 과정이 생략된 찬양은 자칫 공허한 위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철학자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는 25세의 아들을 산악 사고로 잃고 난 후 쓴 저서 『아들에게 보내는 애가』(Lament for a Son, IVP 역간)에서 “성경이 인간 고통의 실존을 가감 없이 인정하기에 이 시편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을 신속히 극복한 승리’만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절망의 무게 그 자체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 주신다는 것이다.
종교 개혁가 존 칼빈(John Calvin)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처절한 어둠 속에서 역설적인 믿음을 발견한다. 그는 시편 기자가 아무런 희망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첫 구절에서 “야훼, 나의 구원자이신 하느님”이라 부르는 것에 주목했다. 비록 입술로는 지옥의 가장자리에 서 있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그 비명을 지르는 대상이 여전히 ‘하나님’이라는 사실 자체를 관계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강력한 증거로 보았다.
우리는 기적이 가득한 신앙 이야기에 더 매료된다. 그러나 신앙은 항상 이런 긍정적인 체험만으로 채워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어려움과 절망으로 사망의 깊은 골짜기를 헤맬 때, 하나님의 긴 침묵은 기도하는 사람을 구원 아닌, 더 어두운 심연으로 밀어 넣기도 한다.
전 세계 수억 명의 이용자가 다양한 주제로 깊이 있는 토론을 나누는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Reddit)에서, 누군가 “시편 88편을 대체 어떻게 설교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한 사용자는 다음과 같은 댓글을 남겼다.
이 시편은 교회 안팎에 존재하는 유해한 긍정주의에 대한 훌륭한 답변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크리스천으로서도, 우리는 속으로는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도 가짜 긍정주의를 내세우고 ‘축복받았어요’라고 위선적으로 행동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자신의 고통 속에서 그것을 그대로 가감하지 않고 하나님께 가져갑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복한 표정을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