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햇감자는 왜 묵은 감자 보다 50배나 비쌀까

감자 수프가 이어준 한국 할아버지와 핀란드 손주

by 어나미

”햇감자 1킬로에 49.99유로”


Screenshot (1543).png < 핀란드 신문 Iltalehti 기사 사진 >


며칠 전 핀란드 신문에 나온 이 가격표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핀란드 한 마트에서 파는 감자 가격이 킬로 당 거의 50유로(약 8만 6천 원)나 된다는 보도가 나온 것이다. 기사를 클릭하며 분명 누군가의 실수일 것으로 생각했다.


핀란드에서 원래 감자는 1킬로에 약 1유로(약 1,720원) 정도로 가장 저렴한 식재료다. 우리나라의 감자 가격과 비교해도 훨씬 싸다. 그런데 왜 그 싸던 감자가 50배나 가격이 뛴 것일까?


기사를 읽어보니 올해 핀란드 땅에서 가장 먼저 수확된 ’첫 햇감자’였기 때문에 가격에 프리미엄이 붙었다는 거다. 핀란드 남서쪽의 자치령, 올란드(Åland) 섬의 비닐하우스에서 재배된 이 감자는 놀랍게도 완판 됐다고 한다. 핀란드 사람들이 이렇게 굳이 비싼 가격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이들에게 첫 햇감자는 단순한 채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햇감자는 춥고 어두웠던 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왔음을 알리는 상징이다. 우리가 봄이 되면 냉이나 달래를 찾듯, 핀란드 사람들은 '햇감자와 청어'를 봄철 최고의 별미로 꼽는다. 긴 겨울을 버텨낸 끝에 맞이하는 봄의 첫맛, 아니 봄 그 자체가 바로 햇감자다.


핀란드의 햇감자는 한국의 햅쌀과 비슷한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어릴 적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인 가을이 오면 나는 왕성했던 식욕이 더 좋아졌다. 망아지도 아닌데 가을이면 함께 살이 올랐다. 주원인은 엄마가 "햅쌀로 지은 밥이다!"라고 강조하며 퍼주셨던 윤기 자르르 흐르던 고봉밥 한 그릇 혹은 두 그릇이었던 것 같다. 어떤 반찬을 곁들여도 너무나 맛있었던 기억이다.


핀란드에 와서 '키토스'(kiitos, 뜻: 감사합니다) 다음에 배운 두 번째 단어가 특이하게 '감자'를 뜻하는 '페루나(peruna)'였다. 핀란드 사람들의 식탁에 항상 등장하는 식재료이기도 했지만 이 단어 자체가 남미 페루(Peru)에서 왔다는 어원을 품고 있어 한 번 들으면 잊기 어렵다.

’키토스’와 ’ 페루나’ 이 두 단어만 알면 핀란드에서 굶어 죽을 일은 없지 않을까 싶다.


이 단어는 우리 아버지가 유일하게 알던 핀란드 단어이기도 했다. 돌아가시기 1년 전, 당뇨 합병증으로 치매 증상까지 온 아버지는 시골에서 요양 중이셨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뵙는 심정으로 아이 둘(3세와 1세)을 데리고 그곳을 방문했었다. 첫째 아이는 처음 본 할아버지가 말도 어눌하고 병약해 보여 낯설었을 텐데도 옆에서 약도 챙겨드리고 말도 안 통하는데 몇 시간씩 할아버지 방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러다 아버지가 아이로부터 자연스럽게 '페루나'란 단어를 배웠던 것 같다. 할머니가 아이에게 뭘 먹고 싶냐고 하면 항상 '페루나'라고 대답을 했고, 엄마는 그런 아이에게 ’감자소고기 토마토 수프’를 끓여주셨다. 처음에는 아이용이었는데, 당시 정상적인 식사를 잘 못했던 아버지는 신기하게도 배가 고파지면 이렇게 외치셨다.

페루나! 페루나!


다른 음식은 잘 못 드셨지만 '페루나 수프'는 너무나 잘 드셨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던 한국 할아버지와 핀란드 손주는 이렇게 '페루나’를 사이에 두고 잊히지 않을 추억 하나를 남길 수 있게 됐다.


감자는 유럽에 16세기에 처음 들어왔고, 핀란드는 그로부터 200년 후인 18세기에 전파됐다. 그전까지 핀란드 사람들의 주식은 서양 순무였다. 몇천 년간 순무만 먹다가 처음 맛본 감자는 얼마나 놀랍도록 맛있었을까. 물론 감자는 맛뿐 아니라 생존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핀란드 사람들은 이전에는 긴 겨울 동안 비타민 C부족으로 봄이 되면 괴혈병에 걸리는 사람들이 많았었다고 한다. 그런데 감자를 먹기 시작한 후부터 괴혈병이 사라졌다.


그래서인지 핀란드 사람들의 감자 먹는 방식은 독특하다. 껍질째 삶은 뒤, 식탁에서 포크와 나이프를 이용해서 껍질을 살살 벗겨가며 먹는다. 이 방식은 껍질 바로 아래 가장 많이 들어있다는 비타민 C를 최대한 보존하는데 최적이다. 수백 년 전에는 영양학자도 없었을 텐데 어디서 이런 지혜를 터득했을까. 아마도 긴 겨울을 견디며 몸으로 배운 생존 방식이 오늘날의 식사법으로 정착된 듯하다. 단, 햇감자의 경우는 껍질이 얇고 부드러워 껍질째 먹기도 한다. 다만 껍질에 솔라닌 성분이 많아 어린아이에게는 주의가 필요하다


처음 핀란드 사람들이 식탁에서 남녀노소 막론하고 감자껍질을 능숙하게 벗기는 모습을 봤을 때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모두 다 마치 숙달된 감자껍질 벗기기 장인 같았다. 한 손은 포크로 감자를 찍은 후 거꾸로 들고 있고, 다른 한 손은 나이프로 연필 깎듯 돌려가며 껍질을 벗긴다. 나도 흉내는 내보았지만, 처음에는 핀란드 사람들처럼 쉽게 되지는 않았다.


Youtube, Tomi Viitanen채널에서 어린이가 보여주는 감자껍질 벗기는 법


한국 어린이들이 어른에게서 젓가락질을 배우듯, 핀란드 아이들도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감자껍질 벗기는 것을 밥상머리에서 배운다. 핀란드에서 간첩을 가려내려면 감자껍질 벗기기를 시켜보면 될 것 같다.


한국에서 온 방문객들이 핀란드에서 감자를 맛보고 나서 꼭 하는 말이 있다. 감자가 너무 맛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핀란드의 짧은 여름, 긴 백야, 서늘한 기온이 감자의 당분을 농축시키는 데 최고의 환경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핀란드에서도 북쪽 라플란드 지방에서 재배된 감자가 알은 작지만 더 진한 맛을 낸다. 실제로 핀란드를 방문한 식도락 프랑스인이 핀란드 감자가 너무 맛있어서 감자 한 자루를 기념품 대신 사갔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감자의 맛뿐만이 아니라, 60종이 넘는 다양한 품종도 놀랍다. 한국에서 감자는 그냥 하나의 감자로만 알았는데, 여기서는 수프용, 오븐 구이용, 매시드포테이토용이 다 다르다. 품종마다 고유 이름도 있다. '반 고흐(Van Gogh)'란 이름을 가진 감자도 있는데, 반 고흐가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 속 투박한 흙빛 감자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조리법 또한 다양하다. 삶거나 찌고, 튀기고... 개인적으로는 슬라이스 한 감자 사이에 크림과 다진 마늘을 넣어 오븐에서 구운 캐서롤을 가장 좋아한다. 물론 어떻게 먹어도 감자는 다 맛있는 감자 맛이다.


감자는 핀란드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과도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행복은 빨간 오두막과 감자밭(Onni on punainen tupa ja perunamaa)."이라는 속담이 핀란드에는 있다. 눈비를 피할 작은 오두막과 굶지 않을 감자밭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핀란드의 소박한 행복관이 담긴 속담이다.


이 속담은 현실에도 이어진다. 핀란드를 대표하는 디자이너 에로 아르니오(Eero Aarnio)라는 분이 있다. 90이 넘으셨지만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신다. 그의 이름은 몰라도 그가 디자인한 볼 체어(Ball Chair)나 '개' 모양의 오브제인 퍼피(Puppy)는 다 한 번쯤 봤을 것 같다. 원래 너무 비싼 가구는 여우의 신포도처럼 관심을 안 가지려 하지만, 이 볼 체어만큼은 명품 가구 중 유일하게 소유해보고 싶은 가구다. 한 번 앉아본 후에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됐다. 의자에 앉았을 뿐인데 마치 엄청 큰 헤드폰을 쓰고 나만의 공간에 빠진 듯한 기분을 들게 해 주었다고나 할까..


Copilot_20260412_004456.png 볼 체어에 앉아 본 필자(얼굴은 토끼로 가렸습니다) <copyright 어나미>
Gemini_Generated_Image_45ski945ski945sk.png 헬싱키 국민광장에 들어선 거대한 Puppy 모형 <copyright 어나미>


이렇게 비싼 의자(8,500유로, 약 1,462만 원)를 만드는 분이니 호화로운 생활을 할 것 같은데,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 세 가지를 이렇게 꼽았다.


사우나 후 호수에서 수영하는 것
친구들과의 저녁,
정말 맛있는 감자.


평생 수만 번은 먹었을 감자가 여전히 이분을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 중 하나였다니….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를 포함, 우리나라 사람들도 윤기 흐르는 따뜻한 햅쌀밥 한 그릇 앞에서는 누구나 잠시 행복해지니까.

지극히 단순한 것들이 깊은 행복감을 줄 때가 있다.


올해 첫 햇감자는 비싸서 사 먹지 못했지만, 날씨가 점점 따뜻해지니 저렴한 노지 햇감자도 곧 나올 것을 기대해 본다. 여름 하지제 때는 핀란드 사람들처럼 방금 쪄낸 햇감자에 딜(dill) 허브와 버터를 곁들여 먹으며, 나도 이들의 행복한 식탁에 숟가락, 아니 포크를 살포시 올려보리라.




P.S. 핀란드 식 마늘 감사 캐서롤 레시피 (핀란드어로 valkosipuli peruna)


재료

감자: 8~10개 (약 1kg)
마늘: 5~8알 (취향에 따라 더 넣으셔도 됩니다. 다져주세요)
생크림: 400~500ml (우유를 섞기도 하지만, 걸쭉하고 진한 맛을 원하시면 생크림 100%를 추천합니다)
양파: 1/2개 (얇게 채썰기)
소금 & 후추: 적당량
선택 사항: 버터 약간 (풍미 증진), 치즈 가루 (위에 뿌리는 용도

요리 순서

1. 감자 손질하기
감자를 깨끗이 씻어 껍질을 벗긴 후, 약 3~4mm 두께로 얇게 썰어줍니다. 너무 두꺼우면 익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2. 마늘과 양파 준비
마늘은 다집니다. 양파는 최대한 얇게 채 썰어 준비합니다.
3. 층층이 쌓기
오븐용 그릇 바닥에 버터를 살짝 바릅니다.
감자 → 양파 → 마늘 순으로 한 층을 깔고, 그 위에 소금과 후추를 살짝 뿌립니다.
이 과정을 반복해서 그릇의 80% 정도까지 층층이 채워줍니다.
4. 크림 붓기
재료가 잠길 듯 말 듯할 정도로 생크림을 골고루 부어줍니다. (크림에 미리 소금, 후추 간을 해서 부으면 간이 더 골고루 배어듭니다.)
5. 오븐에 굽기
200°C로 예열된 오븐에서 약 45분 ~ 1시간 정도 굽습니다.
Tip: 처음 30분은 알루미늄 호일을 덮어 구우면 속까지 잘 익고, 마지막 15~20분은 호일을 벗겨 윗면이 노릇노릇한 갈색이 되도록 구워주세요.
6. 완성
젓가락으로 찔러보아 감자가 부드럽게 들어가면 완성입니다!
오븐에서 꺼낸 뒤 10분 정도 레스팅하며 그대로 두면 크림소스가 감자에 쏙 배어들어 훨씬 맛있어집니다.

더 맛있게 즐기는 팁

치즈 추가: 굽기 마지막 10분 전에 피자 치즈나 체다 치즈를 듬뿍 뿌리면 훨씬 풍성한 맛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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