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피(selfie)보다 취향 드러내는 쉘피(shelfie)가 더 인기
핀란드 MZ세대 사이에서는 지금 셀피(selfie)보다 쉘피(shelfie)가 더 인기다.
셀피(selfie)에 'h' 하나 더 붙은 쉘피(shelfie)는 book-shelf(책장)에서 나온 말로, 내 책이 담긴 책장을 찍는 것을 말한다. 한국 MZ세대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텍스트힙'과 결이 비슷하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책장 전체보다 책에 더 집중한다면, 핀란드에서 유행 중인 쉘피(shelfie)는 책이 여러 권 꽂힌 책장이 주인공이다.
쉘피(shelfie)는 단순한 책장사진이 아니라,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책장을 통해 보여주는 새로운 자기소개 방식이 되고 있다.
독서광으로 유명한 핀란드 대통령도 최근 SNS에 자신의 서재에 있는 책장 사진과 함께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자신의 방』을 읽고 있다는 게시물을 올렸다.
그저 서재와 책장 사진을 올렸을 뿐인데, 국내외에서 답지한 찬사 댓글이 넘쳐난다.
실제로 책을 읽는 세계적 지도자라니, 가장 인상적인 과시(Flex)다.
자국의 대통령과 정책이 부끄러운 미국인으로서, 당신과 당신의 나라가 얼마나 깊은 존경을 받는지 알아달라.
당신의 훌륭한 소통 능력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이제야 설명이 된다!
You are what you read! (당신은 당신이 읽는 책이다)
사람들은 그의 셸피(shelfie)만으로도 그가 추구하는 가치와 지적 성실함을 읽어냈다. 19세기 미국의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도 비슷한 말을 남겼다.
나는 내가 먹은 음식을 기억하지 못하듯
내가 읽은 책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읽은 책들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I cannot remember the books I have read any more than the meals
I have eaten; even so, they have made me.
셀피(Selfie)는 현재 나의 겉모습만을 보여주지만, 쉘피(Shelfie)는 내가 과거로부터 쌓아온 시간의 결을 조용히 드러낸다. 나는 요즘 이상한 버릇 하나가 생겼다. TV나 동영상에서 전문가 인터뷰를 시청할 때, 뒷배경에 혹시 책장이 보이면 그 책장에 꽂힌 책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책 자체에 대한 관심도 있지만, 책을 보면 그 사람을 좀 더 알 수 있을 것 같아 '매의 눈'을 가동하는 것이다.
그러고 내 책장을 보니 잡동사니다. 내 삶이 잡동사니였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아 오랜만에 종류별로 정리해 보았다. 역시 요리에 관한 책이 가장 많다. 그 밖에 신앙 서적과 성서, 가본 곳 혹은 가보지 못한 곳과 관련된 여행 서적과 좋아하는 화가들의 화보집이 있다. 또, 핀란드 의료 시스템이 별로라 스스로 '야매' 건강관리를 하다 보니 수지침과 발마사지, 경락 책도 꽤 많다. 여기에 스키 교습법과 수영법 책까지 끼어 있다. 죽기 전에 꼭 배우고 싶은 스포츠여서 책부터 덜컥 샀지만, 이번 생애에 이 두 종목을 마스터하는 일은 솔직히 말해 희박하다. 모르는 누군가 내 책장을 본다면 나를 만나지 않고도 나의 직업, 취미, ADHD적 성향, 그리고 허황된 꿈까지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핀란드에서는 책장이 SNS 포스팅뿐만 아니라 인테리어로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2000년대 이후 미니멀리즘 인테리어가 크게 유행하며 책장이 거실 벽에서 자취를 감추었었다. 그런데 텅 빈 벽의 '비움의 미학'에 피로감이 쌓였던지, 사람들이 이제는 그 벽을 다시 채우고 싶어 한다. 그것도 다름 아닌 책장으로.
핀란드의 사회학자 리에 헤이킬라(Riie Heikkilä)는 이런 현상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책장은 알고리즘이 내 취향을 결정하는 시대에,
내가 읽을 것을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조용한 선언이다.
다시 거실로 돌아온 책장은 공간에 리듬감을 주며 실내의 울림도 줄여준다.
그리고 벽난로처럼 집 안에 따뜻함과 아늑함을 만들어준다.
유행하는 책장 스타일은 레트로 감성의 70년대식 책장이다. 막 이케아에서 사 온 새 책장보다 오랜 시간을 버텨온 견고한 책장과 그 안에 꽂힌 종이책이 훨씬 더 인기를 끌고 있다. 이렇게 손때 묻은 멋진 책장은 핀란드에서는 새로운 '사회적 지위의 상징물'로도 떠오르고 있다.
나라마다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물은 조금씩 다르다. 좋은 집과 고급 자동차 같이 물질적 자산이 사람의 지위를 나타내는 나라는 많다. 반면, 핀란드에서 지위의 상징으로 떠오른 책장은 이런 부(富)와는 거리가 있다. 손때 묻은 책들이 빽빽이 꽂힌 책장은 돈으로 단숨에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책장이 굳이 자랑할 게 있다면 '돈'아닌 '시간'일 것이다. 책장은 주인의 호기심과 성실함이 오랜 시간 쌓여 만들어낸 시간의 켜이기 때문이다.
책장이란 아주 특별한 가구는 거실을 빛내주고, 그 책을 읽는 주인까지도 빛이 나게 해 준다. 요즘 한국에서는 대형 서점이 MZ세대의 '번따(번호 따기)' 성지로 떠오르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우리 때만 해도 즉석만남이 나이트 같은 곳에서 이루어졌었는데, 생각해 보면 서점이야말로 '무도장'보다 사람을 더 잘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이다. 어떤 책 코너 앞에서 오래 머물며 고르는 책을 보면 그 사람의 지적 취향과 성실함까지 엿보게 된다.
지금은 내 연애세포가 고대화석처럼 딱딱히 굳어버린 지 오래지만, 그래도 가끔씩 한 번 더 돌아보게 되는 남성群(군)이 있다. 공공장소(기차 안이나 카페 등)에서 책 읽는 남성이다. 그런 남성을 목격하면, 독서하는 얼굴을 한 번 쳐다본 후, 어떤 책을 읽나 살짝 훔쳐보기까지 한다.
실제로 핀란드 사람들은 책과 무척 친하다. 인구 560만 명밖에 안 되는데 공공도서관이 무려 723개에 달한다. 도서관은 보통 동네 마트만큼 가깝다. 실제로 마트와 같은 건물에 도서관이 들어서 있는 곳도 많다. 연간 1인당 방문 횟수는 9.1회, 대출 권수는 15.3권에 이른다. 이는 EU 평균의 두 배를 훌쩍 넘으며 세계 최상위권 수준이다. (출처: Libraries.fi, 2024)
핀란드인의 이런 독서 습관은 어린 시절부터 길러진 것이다. 핀란드 아이들은 걸음마를 시작하면서 부모와 함께 도서관을 찾고, 거기서 주로 논다. 핀란드 도서관은 보통 절반이 아동 공간으로 할애되어 있는데, 책만 읽는 게 아니라 키즈카페처럼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도록 잘 만들어져 있다. 물론 사용료는 무료다.
밤에는 집에서 아이들을 위한 또 다른 독서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핀란드 부모 중 92%나 아이가 잠들기 전 동화를 읽어주는 것을 루틴처럼 지킨다고 한다. 아무리 바쁘고 피곤하더라도 '저녁 동화 시간'만큼은 빠뜨리는 법이 없다. 이는 아이에게 "세상이 아무리 바빠도 너와 책을 나누는 이 시간만큼은 멈춘다"는 깊은 안정감을 선사한다. 부모의 목소리로 이루어진 '라이브 오디오북'에 맛을 들이게 된 아이들은 책을 공부가 아닌 '휴식과 사랑'으로 기억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이유로 핀란드인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자연스럽게 책을 찾게 된다.
핀란드인의 국민 취미는 모두가 알듯 사우나, 그리고 하나 더 추가하면 독서다. 심지어 요즘에는 이 두 취미를 합친, 공공 도서관과 공공 사우나를 결합한 건축물이 핀란드 곳곳에 들어서고 있다.
핀란드인은 육체는 사우나에서, 영혼은 도서관에서 씻는 셈이다.
최근 몇 년 간, 핀란드는 국가경쟁력, PISA 테스트 등 여러 국제 지표에서 예전처럼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다. 핀란드의 황금기가 지났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나는 핀란드가 이렇게 끝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유는 하나다.
책 읽는 민족은 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책장이 거실로 다시 돌아오는 핀란드에, 희망도 함께 돌아오고 있다고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