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정찬] 연탄재 무덤

by 온비

긴 밤을 태우던 연탄이 대문 앞에 널려 있다. 눈 비비며 새벽마다 연탄을 갈아 끼우던 아빠의 엄마의 누렇게 뜬 얼굴이 희미하다. 삶에 대한 간절함도, 대의를 위한 것도 아닌 다만 자식들이 추위에 떠는 일만은 막아야지 하는 사랑의 증표이다. 그렇게 태워낸 사랑이 뽀얀 살빛을 드러낸다.

아침나절 뜨거운 몸을 식힌 연탄에 여럿이 눈독 들인다. 하얗게 태운 연탄의 사정이야 낸들 알게 뭐람. 와르르 모여들어 얄궂은 발을 들이댄다. 뭉근히, 진득하니 탄 몸은 그들의 발밑에서 와르르 바스러진다. 작은 먼지가 일었다 사그라든다. 얼마간 꼬순 향기를 내뿜고 우리 집 마당 한구석에 끌려와 쌓인다, 연탄재 무덤에.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은 발들은 여남은 덩어리를 잘게 부순다.

수천 년간 쌓인 고대 지층이 깎여 이뤄낸 입자인가. 침 흘려가며 밟아 만든 고운 미사(微沙)는 층층이 쌓여 무대가 된다. 높지도 않다. 저 구석에 무언가 평평히 구릉을 이뤘구나 하는 정도이지만 한쪽으로 기울어진 완만한 경사는 또렷한 입출구이며, 그들에게는 어느 전당의 단상도 부럽지 않은 것이 된다.

무대는 날마다 새롭게 바뀐다. 서늘한 가을이 되면 높아지고, 비라도 내린 다음날이면 한쪽으로 더 기울어지는 것. 한여름엔 무기한 휴무다. 그나마도 반가운 장마에 몇 장이나마 마련되지만 축축해져 밟는 재미도 만족스럽게 부서지지도 않는다.

그들만의 무대 위 어떤 장면들이 펼쳐졌을까. 큰언니 졸업식날 꽃 한 다발을 가지고 돌아가며 사진을 찍었다. 연탄재 무덤 위에 올라서면 세상이 다 보였다. 들뜬 표정, 기쁨과 축하의 마음이 한켠에 쌓인다. 막내 동생이 울면 어르고 달래기도 한다. 누나들의 막내 동생 쟁탈전은 늘 그렇듯 가위바위보로 정해졌고 사랑과 애틋함이 가득 포개어진다. 싸우기도, 토라지기도 하는 것도 그 위에서고, 부모님께 혼난 뒤에도 거기 쪼그려 앉아 화를 삭인다.

가장 뜨겁게 타올랐다 차갑게 식어 끝끝내 꼬마들 발에 밟혀 부서진 잿더미. 웃고 울던 어린 추억이 차곡차곡 축적되어 커다란 구조물이 된다.

처음 연탄이 우리 집에 오던 날이다. 연탄을 가득 실은 트럭 바퀴가 좁다란 시골길에 커다란 자국을 낸다. 아슬아슬 비집고 뒷간 옆 창고에 다다르면 노란 고무장갑을 낀 긴장한 얼굴의 아빠가 기다리고 있다. 한 장의 연탄도 떨구지 않겠다는 앙다문 입은 비장하기까지 하다. 나를 기준으로 위의 자매는 이 거룩한 연탄 옮기기 작업에 투입된다. 연탄 한 장이 첫째 손에서 둘째 손으로, 둘째 손에서 엄마 손으로, 엄마 손에서 아빠 손으로 널뛰기한다. 이 아름다운 현장에 나도 끼어보고 싶어 틈을 노려 보지만 떡국 한 그릇 더 먹어야 가능한 일이다.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온 가족이 힘쓰는 일은 삶의 가장자리 희미한 끈을 아등바등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참혹한 현실을 정면으로 맞서는 일이었다.

연탄이 있어 밤이 뜨거웠다. 따뜻한 밥과 국물도 지었다. 더운물에 꽁꽁 언 손이 녹아들던 감각을 여태 잊지 못한다. 그 외에 다른 어떤 것도 그에게 기대하지 않았다. 서로에게 사용되고 쓰이길 서슴지 않았다. 다만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던 작은 발들은 그 무덤 위에서 그가 비바람에 쓸려 가는 날까지 곁에 있어 주었다.

누군가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는지 모르겠다. 연탄 한 장 되어주지 못한 것 같지만 다른 건 몰라도 끝까지 옆에 있어줄 수 있는 사람은 된 것 같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말라던 안도현 시인의 시가 탄생될 무렵이다. 갓 국민학교에 입학한 나는 시인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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