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1월 말은 매섭게 춥다.
꼭 러시아에서 겪었던 그 겨울처럼.
그날은 ‘조윤미의 크레셴도 해설 콘서트’에서 ‘슈만 피아노 협주곡’을 해설과 연주로 함께 나누기로 한 날이었다.
마침 일주일 뒤 예술의 전당에서 예정된 ‘임윤찬 피아니스트’의 협연을 앞두고,
많은 분들이 이 곡에 대한 해설을 궁금해하셨다.
‘모두들 이 추위를 뚫고... 정말 오실 수 있을까.’
하지만 내 걱정과는 달리, 많은 분들의 응원 속에 피아니스트와 관객,
우리 모두는 다시 슈만의 시간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오늘 너무나 큰 선물을 받아갑니다. 1열에 앉아서 귀호강 크게 하고, 느끼고, 좋은 연주와 강의 너무나 감사합니다.’
-배은아-
‘언제나처럼 담백하지만 깊이 있는 살롱콘서트, 정말 애정하고 존경합니다.’
-Serena Pak-
‘음악과 커피 향에 흠뻑 취해서 갑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오프라인에서 더 자주 뵙고 싶습니다.’
-이현경-
‘슈만을 실제로 만나지 못해도 피아노 연주로 열정적인 연주를 해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메리메리킴-
‘반갑습니다. 한국에 여러 번 방문했지만 이번엔 의미가 깊은 방문이었어요.
감사합니다.’
-김신희-
‘슈만 피아노 협주곡을 라이브로 연주와 함께 생생한 해설을 해주셔서 감동의 순간이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서비스로 해주신 슈만 Op.16, N.1은 슈만의 정서가 적나라게 드러나는 처음 경험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런 귀한 연주 마련해 주셔서 진심 감사드려요.’
-솔랑쥬-
‘바쁘셨을 텐데 시간 만들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방송에서 차별화된 작품해설이 제겐 정말 큰 도움이 되고요.
무엇보다 선생님 연주를 꼭 한번 들어보고 싶었어요.
생각지도 않은 슈만 Op.16을 들으면서 기회가 되시면 좀 더 많이 참여할 수 있는 큰 콘서트를 열어 주시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클래식 음악을 워낙 좋아해서 아침에 눈뜨자마자 떠오르는 곡을 골라 오디오로 들어요. 그날그날 달라지기도 하지만 한참 빠져있는 곡에선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하기도 한답니다. 틈나는 대로 클래식 음악을 듣는데 어느덧 선생님 Live 듣는 것도 일상이 되었답니다.
깊이 있는 음악적 해설과 열정을 가지고 방송해 주셔서 덕분에 보물을 얻는 기분이랄까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공희원-
‘무척 기뻤습니다. 조윤미 선생님의 심장을 들었다 놨다 하는 피아노 소리에 감동이 엄청났습니다.’
-송재경-
해설 시간이 끝난 뒤, 우리는 로비에 둘러서서 서로 인사를 나누며 느낀 점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자연스럽게 가졌다.
“선생님이 생방송에서 본인 연주에는 호랑이와 사자 같은 동물들이 등장한다고 하셨는데, 그 말이 정말 사실이었어요.”
그 말을 듣자 모두가 함께 웃었다.
또 어떤 분은 내 연주 스타일이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비슷하다는 말씀을 해 주셔서 놀라기도 했다.
피아노의 ‘여제’라 불리는 마르타 아르헤리치라니.
감히 내가 비교할 수도 없는 마에스트로 아닌가.
이름 앞에서 나는 잠시 숨을 고르게 되었다.
그녀의 연주는 늘 예측 불가능하다.
폭발하듯 시작하다가도, 한순간 숨을 멈추는 듯한 고요로 떨어진다.
계산된 해석이라기보다, 악보 깊숙한 곳에서 솟아오르는 ‘본능’에 가까운 그녀의 음악.
'혹시 내가 건반 위에서 쏟아냈던 그 ‘불꽃’ 같은 본능을, 구독자분들도 느끼셨던 걸까...'
그 질문은 나를 오래전 러시아의 한여름으로 데려갔다.
러시아의 여름, 그때 그 시절
당시 나는 박사 과정 마지막 독주회 시험을 약 세 달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돌연, 시험을 앞둔 시점에서 모든 연주회 프로그램을 새로 준비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게다가 비자 문제까지 겹쳐,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학위를 마치지 못한 채 수료로 돌아가야 하는 처지였다.
짧은 시간 안에 모든 작품을 새로 준비해 무대에 올려야 했던 긴박했던 순간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긴장과 압박은 몸이 먼저 기억한다.
오금이 저려오는 듯한 그 절박함 속에서, 내가 만나게 된 곡이 바로 ‘슈만 피아노 협주곡’이었다.
그래서 그때의 나는 이 곡을 선택했다기보다, 이 곡에 붙잡혔다는 표현이 더 맞겠지.
‘빨리 이 곡에 익숙해져야 해.’
해가 언제 뜨고 지는지,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조차 느끼지 못한 채
나는 하루 종일 자취방 피아노 앞에서 그야말로 사투를 벌였다.
음표들이 이어져 만들어 내는 멜로디와 화성들은 끊임없이 내 안에서 흐르고 있었고,
나는 음악 외에 그 어떤 것도 내 시간 속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스승에게 나의 연주를 들려주었다.
연주가 끝난 뒤, 스승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악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여셨다.
너는 지금 음을 치고 있는 게 아니라, 시간을 쫓고 있다.
서두르지 마라. 슈만의 화성이 변하는 틈새를 느껴라.
나도 그러고 싶지. 누가 안 듣고 싶겠는가. 급한 상황에 마음이 불안하니 힘들어서 그러지.
그리고 마침내, 연주 시험 당일.
긴장으로 굳은 손을 매만지고 있는 나를 보던 스승이 낮게 말했다.
“오케스트라 파트의 내 반주 소리를 듣고 따라와.”
드디어 슈만 피아노 협주곡 1악장’이 시작되었다.
나는 오보에의 음색을 마음속에 떠올리며 오케스트라 파트 반주를 들었다.
그리고 왼손 5번 손가락으로 ‘라’를 깊이 누른 뒤,
C–H–A–A(도–시–라–라)의 코드 멜로디를 조심스럽게 펼쳐 나갔다.
스승이 강조했던 그 화성.
그 진행은 작곡가 슈만이 연인 클라라를 향해 남긴 간절한 암호와도 같았다.
그의 음악은 이미 사랑의 이름을 품고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새 2악장을 지나,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3악장에 이르자 꽤나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그전까지는 내가 음악을 밀어붙이려 애쓰고 있었다면,
연주가 이어지는 동안에는 오히려 슈만의 음악이 나를 이끌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아. 이게 뭐지? 음악에 끌려 손가락이 움직이네? 아...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게 바로 이거구나.’
시간을 쫓지 않으려 하자 손끝의 힘이 빠졌고,
서두르지 않으니 화성이 비로소 귀에 맺히게 된 것.
음악을 끌고 가려고 치지 않고, 음악을 따라 걷는 연주를 하게 된 것이었다.
지금은 예술의 전당
‘임윤찬 피아니스트’의 ‘슈만 피아노 협주곡’을 듣기 위해 난 로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첫 음이 울리기 직전의 그 짧은 정적 속에서,
나는 더 이상 시간을 쫓고 있지 않았다.
그저, 화성이 열리는 틈을 기다리고 있었다.
20대 초반이라고 하기에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이미 대가의 깊은 연주를 보여주는 임윤찬 피아니스트.
그의 절제와 겸손한 자세가 보이는 음악소리에 나는 기쁨과 가슴속 환희를 느꼈다.
구독자 분들이 내 연주에서 ‘호랑이’와 ‘사자’를 느꼈다고 한 이유는,
아마도 내가 음악에 완전히 나를 던졌기 때문일 것이다.
스승님의 말씀처럼 시간을 쫓지 않고 화성에 몸을 실었을 때, 연주자와 청중 사이의 벽은 허물어진다.
러시아에서 사투를 벌이며 공부했던 슈만 피아노 협주곡.
시간을 쫓기 바빴던 그 서툰 열정도, 이제는 내 안에서 숙성되어 ‘불꽃’ 같은 본능이 되었다.
결국 음악도, 삶도 '힘을 빼는 기술이 깊이를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힘을 빼는 기술이 깊이를 만든다.
움켜쥐려 할수록 달아나던 선율들은 내가 욕심을 내려놓은 순간 비로소 내 손을 잡아주었다.
삶의 박자가 조금 빨라지거나 느려지더라도,
화성이 변하는 그 틈새를 즐길 줄 아는 여유가, 이제는 내 안에 조금 생긴 것 같다.
나의 크레셴도는 바로 그 틈새,
음악이 나를 이끌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매일 새로 피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