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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경 Feb 11. 2024

명절의 두 얼굴 : 상처로 얼룩진 18년 전 선물(1)


내일은 우리나라 고유 명절 설날이다. 이 시간은 많은 이들에게 다채로운 추억을 선사하는 날이다. 나에게 설날 하면 떠오른 건 무엇일까? 풍성한 음식들이 차려져 있는 상?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화투나 윷놀이에 웃음꽃을 피우는 모습? 때로는 결혼한 여성들이 겪는 시집살이? 각자의 기억 속에 다른 색깔로 남겨진, 긴 연휴의 순간들.   

  

나에게 설날은 단순히 고유의 행복한 명절을 넘어서, 깊은 감정의 골짜기에 헤매는 시간이다. 아들이 18살이니, 벌써 18년이나 지난 일인데 나의 상처는 아물지 못하고 내 마음 한켠을 차지하며 수시로 괴롭힌다.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꿈에서조차 나를 눈물바다로 몰아넣은 그 기억들. 가끔 생리 때, 그때가 생각나면 그달은 하루하루가 지옥이다. 한동안 생각나지 않았는데, 어제와 오늘 머릿속에서 나를 미치게 만들고 있다.     



18년 전 나는 아들을 임신하고 있었다. 뱃속의 작은 생명과 함께한 7개월쯤 되었을 때, 갑작스러운 시어머니의 부재는 큰 충격이었다. 아직도 그때 기억이 생생하다. 학원을 하던 그 시절, 남편은 크리스마스에 만삭된 나를 남겨두고 태안 본가로 향했다.     


처음엔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남편은 나를 위한답시고 힘드니깐 어린 딸은 데리고 가겠다며 혼자 집에서 쉬라고 했다. 서운하고 혼자 있어야 한다는 불안감 속에서도, 남편의 선택을 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 결정이 남편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남편은 내가 하는 말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시댁 일에는 더욱 민감했다.      


다행이었다. 그때 못 가게 했으면, 평생 나는 남편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살았을 것이다. 자가용도 없던 그 시절, 남편은 어린 딸과 함께 고속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후에 남편은 딸이 버스에서 대변을 보는 덕에 기저귀를 차 안에서 갈았단다. 차 안의 사람들이 아빠 혼자 어린 딸을 데리고 쩔쩔매는 모습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냄새난다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단다. 그때 자신이 얼마나 당황스러웠겠냐며 같이 가지 않는 나를 원망하며 말했다.      


이런 점도 나와는 달랐다. 그때 당시 같이 가자고 했으면 분명 나는 따라갔을 것이다. 내가 싫고 불편해도 내 남편이 원하는데 싫다고 하지 않았을 텐데. 그때는 나를 위하는 척 집에 있으면서 쉬라 하고는 나중에 이런 식으로 뒤통수치며 나를 나쁜 년으로 만들었다.     




남편은 학원 때문에 12월 24일에 가서 25일에 돌아왔다. 28일 오후에 남편이 수업 도중 아이들을 돌려보내고 있었다. 깜짝 놀라 남편 교실로 갔다. 남편은 울고 있었다. 당황스러운 나는 왜 그런지 물었다. 건강하셨던 시어머니께서 28일에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믿을 수 없었다. 정이 있던 시어머니는 아니셨다. 시골에서 고생하시며, 자신밖에 모르는 분이셨다. 하지만, 나에게는 특별하셨다. 다른 며느리와는 달리 이뻐해 주시고 챙겨주셨다. 나도 거기에 보답하기 위해 갈 때마다 넉넉히 용돈을 챙겨드렸다.     


며느리들에게 용돈이란걸 거의 받지 못했던 어머니는 그 돈을 여기저기 자랑하기 바빴다. 나는 형님들 앞에서 못하게 막으면서도 좋아하시는 노인분들이 우리 부모님 같아 최대한 잘해드리고 싶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차가 없었다. 나는 뭘 싸준다고 해도 사양했다. 둘이 많이 먹지도 않지만, 들고 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형님들에게 양보했다. 우리가 서울로 올라오면 어머니와 아버님은 며칠 안으로 이것저것 택배로 보내셨다. 항상 감사했다. 힘들게 농사지으신 귀한 농작물을 아낌없이 주셨다.     


그런 분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시골집에 가보니 우리 딸이 버리고 온 기저귀도 아직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지 않고 방안에 굴러다녔다. 추운 겨울에 하나라도 더 심겠다고 하우스 일을 하시다 돌아가신 시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노산에, 임신 막달에, 1월 초 방학 특강 준비에, 기운이 딸렸던 나는 태안까지 버스 타고 가는 것만으로도 지쳐있었다. 거기다 슬픔에 체력이 이겨내지 못했다.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아주버니 차를 타고 시내로 나와 산부인과에 입원했다. 장례식장에 거의 있지 못했다.     


장례식장에서 장지로 가는 차를 뒤로 하고 나는 태안역으로 갔다. 몸도 좋지 않았고, 어린 딸은 어린이집 원장님께 맡기고 왔기에 빨리 서울로 올라가고 싶었다. 버스 안에서의 내 모습이 불쌍하고 처량했다.      


집에 도착하자, 거의 실신 직전이었다. 하지만, 어린 딸부터 데리고 왔다. 지친 몸으로 어린 딸을 보는 게 나에게는 무리였다. 삼우제가 끝나고 남편은 다행히 특강 시작일 전에 왔다.

     

말 없는 남편은 표정으로 자신의 나쁜 감정을 표출했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도 말이 없었다. 힘들어하는 나를 보면서 무언으로 자신의 기분만 표출하고 있었다.      




13일 특강이 시작되었다. 방학 특강 때는 나도 수업이 많았다. 특강은 1달이지만, 그때는 수업하면서 다음 학기 시간표 등 사무적인 일도 평상시의 2배 이상이었다.     


그해 특강에는 개인과외까지 있었다. 그때만 해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들어오는 수업을 마다하지 않았다. 나는 죽을 거 같았지만, 수업에 들어갔다. 저녁에 집에 오면 어린이집에서 오는 딸을 챙기며 힘들어 어쩔 줄 몰랐다.  

   

남편에게 힘들어 죽겠으니 빨리 좀 들어오라고 했다. 남편은 “아침까지 죽겠다더니 수업할 때는 멀쩡하더라. 장례식 때도 죽겠다며 병원에만 있더니, 장지도 안 가고.”라며 꽤 병 좀 그만 부리라며 마음속의 불만을 메시지로 보냈다.   

   

나는 다시 정말 죽겠다고 빨리 들어오라는 메시지를 보랬다. “죽겠어서 좋겠다.”라며 답변이 왔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그렇게 매일 매일 싸우면서 한 달을 보냈다.      




특강 마지막 날, 참다못해 진료받던 산부인과에 갔다. 의사 선생님은 깜짝 놀라 입원하라고 했다. 그날이 마침 금요일이었다. 월요일에 퇴원할 생각으로 입원했다. 저녁에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응급 상황이었다.      


병원에서는 아이가 지금 나오면 안 된다며 조산을 막는 혈관주사를 놓았다. 나도 아이도 안정이 필요하다며 계속 쉬어야 한단다. 남편에게 며칠만 쉬고 올 테니 딸 좀 챙기라고 메시지만 남겼다.     




우리의 사이는 최악이었다. 둘째를 가진 그날부터 남편의 불만은 하늘을 찔렀다. 나와 남편은 딸 하나 키우기도 힘들어했었다. 인천 형님에게 맡겼다 마음에 안들어 데리고 와서는 어린이집에 의존하며 매일 힘들다고 불평하는 나에게 불만이 많았다.      


임신했다는 내 전화에 남편은 “끊어끊어!”하며 먼저 끊어버렸다. 몸이 약한 나는 임신했을 때, 힘들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남편의 냉정한 목소리를 듣으며 학원으로 온 나는 심란했다.     


그런 나를 위로는 못 해줄망정, 내가 싫어하는 참외를 사 와, 학원 선생님과 웃으면 내 옆에서 먹고 있었다.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기가 막혔다. 직원 앞에서 표현도 못하고 혼자 열이 받았다. 그때부터 우리는 임신 내내 부딪쳤다.     


임신 중에 남편은 나를 방에 가두고 폭력까지 행사했었다. 그때 이유도 없었다. 시누이가 서울에 왔다며 갑자기 동생들을 불렀다. 남편은 고등 수업이라 거의 쉬는 날이 없었다. 누나가 부르자 수업도 마다하고 나가는 남편에게 중요한 일도 아닌데, 집에서 딸을 좀 봐달라고 했다는 이유였다.     


우리 집도 정상적이진 않았지만, 시댁은 더 심했다. 시누이가 남동생 3명의 가족이 편히 사는 꼴을 보지 못했다. 더 이상한 것은 삼형제가 누나 말이라면 죽는시늉도 한다는 거다. 우리는 그때 차가 없었지만, 새벽이라도 부르면 두 동생은 누나가 사는 지방까지 내려갔었다.      




우리의 사이는 시어머님가 돌아가시고 모든 게 극에 치달았다.


남편은 나의 부재에 화가나 전화했다. 병원에서 응급 상황인 나는 받지 않았다. 메시지에 지금 어디냐며 가만두지 않겠다며 협박의 메시지가 계속 왔다. 병원이라고 해도 믿지 않았다.     


병원에 전화해서 확인해 보라고 해도 내 말은 들리지 않았다. 다음날 병원에 찾아와서 사실 확인만 하고 갔다. 병원에서는 아이 날 때까지 퇴원할 수 없다며 장기 입원을 권했다. 나는 병실료 때문에 1인실에서 7인실로 옮겼다.      


그때만 해도 1인실 병실료가 엄청났다. 그때는 실비라는 보험도 없었다. 7인실에 입원하니 나 같은 주사를 맞는 환자들이 여럿 있었다.     


- 계속     


2024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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