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후, 유방암이 올 때까지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지만, 그해 겨울만큼 유난히 길고 차갑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나의 몸에는 귀한 생명을 품고 있었지만, 마음은 한겨울의 꽁꽁 언 대지와 같았다.
늦은 나이에 임신이라는 귀한 선물을 받았음에도, 내게 다가온 시련은 끝없는 어둠 속 동굴을 헤매고 있었다.
조산을 막는 주사는 내가 맞을 당시 만 해도 오직 아이가 일찍 출산하는 걸 막는 것에 초점을 두었기에 산모에게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조산의 정도에 따라 주사량을 조절하기 때문에 전기 카트가 달려있었다. 나는 가장 낮은 수준이었지만, 조산기가 심해 주사량이 높은 산모는 누워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다른 산모들은 남편과 시어머니 등 가족들이 매일 면회 와 위로해 주었고, 항상 새로운 음식들을 마련해 주었다.
부러웠다. 부모 복 없는 년은 시댁 복도 남편 복도 없었다. 남편은 1주일에 한 번 정도 딸을 보여주기 위해 예의상 왔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내게 향해 있지 않았다.
한번은 남학생 한 명과 딸 셋이 왔다. 남학생은 남편이 수업할 때 우리 딸과 놀아주는 아르바이트 학생이었다. 학생과 남편이 잠깐 나간 사이, 딸이 내 침대에서 뛰다가 남편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핸드폰에 메시지가 와있었다.
“사랑해요. 용용!!”
짧은 한 줄의 문자는 나의 마음을 얼음장처럼 차갑게 얼려버렸다. 우리 사이의 균열이 너무 깊어져 버렸음을 일깨워 주는 내용이었다. 누군지도 안다.
여름부터 남편은 밤 12시가 되어도 수업한다는 핑계로 집에 일찍 들어오지 않았다. 딸이 잠을 자지 않을 때, 아이와 학원에 가면 둘이 교실에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남편을 의심해 보지 못했다. 당연히 개인과외라고만 생각했었다.
둘째를 임신하기 전 남편은 수업하면서 학생들에게 숨겨 논 아들이 있다고 했다며 어떤 학생이 나에게 알려주기까지 했다. 나는 왜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하고 다니냐며 기분 나쁜 듯이 말한 적도 있었다. 그러면 뭐 어떠냐며 나를 이상한 의처증 부인처럼 취급하였지만, 그런 말을 다시 하지는 않았다.
남학생이 먼저 병실로 들어왔다.
“용용이 학원에 자주 오니?”
“제가 없을 때 자주 오나 봐요. 제가 오면 갈 때도 있고, 제가 갈 때쯤 와서 따님을 봐주기도 해요.”
남편이 왔다. 딸은 학생에게 맡기고 나는 조용히 말하자며 남편을 병실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싸우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내가 약자고 외로움이 깊어져 위로가 필요했다. 나는 단지 아니라는 말 한마디만 듣고 싶었다. 핸드폰을 주면서
“이게 뭐야? 지금 뭐 하고 다니는 거야?”라며 조용히 강하게 물었다.
“또 시작이다. 건수 잡았구나!”라며 사과는 관두고 비아냥대는 남편의 표정과 대답에 나는 이성을 잃었다.
“뭐라고? 지금 말 다 했어?”
“너 예전에도 내가 친구에게 돈 주었다는데 믿지 않았지?”
갑자기 2년 전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 학원 인수하고 남편의 과외로 겨우 적자 메우기 바쁠 때였다. 뱃속엔 딸이 있었고 남편은 하루하루 힘들어하며 경제적 어려움으로 허덕일 때였다. 남편 통장에서 200만 원이 여자 이름으로 빠져나갔다.
누구냐고 물었을 때, 남편은 친구에게 주었다고만 했다.
“여자 이름인데 무슨 친구?”라며 따지자, 남편은 친구 딸이라며 내가 내 맘대로 돈도 못 쓰냐며 화를 냈었다.
그때만 해도 남편이 어려운 학원을 혼자 애쓰며 살았고, 내가 좋아하는 마음이 커 화는 냈지만, 그냥 넘어간 일이었다.
“아니 뭘 잘했다고 지금 나에게 그걸 말하는 거야? 그 상황에 그냥 넘어갈 여자가 어디 있어? 내가 그때도 임신했고 당신 힘들어하는 모습 때문에 그냥 넘어간 거지!”라고 말하자,
예상했다는 듯이 “너는 항상 그런 식이야!”라며 경멸하는 표정으로 나를 독한 여자로 몰고 갔었다.
그러면서 확인시켜 주겠다며 바로 친구에게 전화했다. 확인을 원했던 그때 당시에는 무시하더니만, 지금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꺼내 확인까지 시켜주는 것이다.
살면서 싸울 때마다 우리의 문제가 뭔지 생각해 보았다. 나는 그 당시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문제를 풀려고 할 때, 남편은 뜬금없이 몇 달 전이나 몇 년 전에 있었던 서운한 이야기를 꺼낸다. 그때마다 나는 언제 무슨 일인지 생각하다 초점을 잃어버린다. 가끔은 기억나지 않아 나쁜 년으로 넘어갈 때도 많았다.
그때도 나는 “용용”이 문제를 이야기하는데 2년 전 사건으로 돌아가 나를 의처증이 심하고 돈밖에 모르는 여자로 몰고 가고 있었다. 나는 또다시 초점을 잃었다. 그냥 흥분해 버렸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지금 20살짜리하고 뭐 하는 거야? 미친 거 아니야?”라며 소리를 질렀다. 병실에서 친했던 동생 남편이 뛰어나왔다. 깜짝 놀라
“지금 임산부에게 충격주면 안 돼요! 무슨 일이세요?”라며 우리를 말렸다. 거기다 주사 카트는 배터리 소모로 전기 연결이 필요하다며 “삐삐” 소리로 시끄럽게 울렸다. 그 소리에 수간호사와 간호사까지 뛰어왔다.
남편은 경멸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며
“너는 사람을 들들 볶는구나! 그때도 그러더니 이게 뭐가 문젠데? 돈밖에 모르는 네가 뭘 알겠냐?”라며 강하게 말했다.
“뭐가 문젠데? 그래. 나 돈밖에 몰라? 그래서 네가 나에게 돈 얼마나 벌어다 줬는데? 그때 우리 생활비도 모자랄 때, 200이란 돈을 말도 없이 모르는 여자 이름으로 보냈는데 가만있을 여자가 어디 있어?”
“너는 너밖에 모르잖아? 말해도 안 믿고? 내가 벌어서 내 맘대로 못쓰냐?”
“그럼. 왜 결혼했어? 혼자 살지? 그리고 내가 너희 엄마 죽였어? 장례식 다녀온 뒤로 나에게 왜 이래?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어? 아프다고 특강 다 펑크내? 힘든 몸으로 수업한 게 그렇게 화낼 일이야? 나도 죽을 뻔했어? 난 열심히 산 죄밖에 없어.
내가 힘들다고 할 때 너 뭐라 했어? 너 아빠 맞아? 임신 내내 너 나한테 어떻게 했어? 내가 나가서 애 만들어 왔어? 막말로 내가 나가서 애 만들어 왔어도 같이 사는 임산부한테 이렇겐 못하겠다. 내가 왜 임신 내내 참았는지 알아?”라며 나는 미친 듯이 막말하며 소리 질렀다.
병원에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정신 줄이 나갔다. 간호사들은 산모와 아이에게 위험하다며 나를 끌고 병실로 들어가려 했고, 나는 울며불며 미친년처럼 소리 지르고 있었다. 병실 동생 남편은 딸과 학생을 불러 남편과 함께 집으로 보냈다.
병실로 들어온 나는 혼자 있고 싶어 커튼 치고 울고만 있었다. 주말이라 보호자들이 다 와있었지만, 모두가 나 때문에 조용했다. 내 생전에 이렇게 무식하고 미친 짓을 할 줄은 몰랐지만, 나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의사 간호사 모두 출동했다. 내가 진정하고 나니 뱃속 아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나는 울면서 배를 쓰담쓰담 문질렀다.
“미안해. 아들아! 엄마가 참아야 했는데. 정말 미안해. 엄마가 너는 꼭 지켜줄게. 걱정하지 마. 지금 나오면 안 돼. 조금만 참자.”라며 뱃속 아들을 달래고 있을 때, 문자가 왔다.
“우리 출산하고 산후조리 끝나면 이혼하자. 내가 딸은 데리고 갈 테니 너는 뱃속 아기 책임져라! 지금은 쉬고 출산하고 다시 이야기하자.”라는 글을 보면서 나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나도 이혼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두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절대 아이를 포기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혼자 둘을 키울 자신도 없었다. 남편은 딸에 대한 애정이 깊었지만, 뱃속 아기에 대한 정은 없어 보였다.
그 뒤로 남편은 한두 번 더 면회 왔었다. 뱃속 아기가 37주 되는 날 조산을 막는 주사를 뽑았다. 그날이 음력 12월 30일이었다. 빼고 몇 시간 지나자, 진통이 왔다. 이틀 동안 아들은 딸보다 더 심한 진통을 겪었다. 음력 1월 1일 아들을 출산했다.
출산 후, 의사는 탯줄 자를 남편을 찾았지만, 딸과 함께 밖에서 들어오지 않았다. 딸이 아빠를 못 들어가게 했단다. 소중한 내 아들의 탯줄 자르는 의사의 모습을 보며 나는 소리 없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간호사와 의사는
“순산입니다. 왜 우세요? 건강한 아들입니다.”라며 나를 위로했다.
우리 아들 생일은 음력 1월 1일이다. 나는 이날을 잊기 위해 기도도 많이 했고 살면서 많이 울었다. 하지만 아들 가진 9개월간의 설움과 외로움, 멸시와 무시 등은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사라지지 않았다. 마지막 1달간의 외로운 병원 생활은 최악이었다.
이후에도 우리의 관계는 더욱 나빠져 서로에게 하면 안 되는 막말까지 하며 8년이라는 세월을 지냈다. 나에게 예견된 유방암이 찾아왔다. 지난 세월을 뒤돌아보고 싶지는 않지만, 되돌아보면 이일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때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말 없는 눈물이 멈출 줄 모른다. 지금 열심히 일하고 최선을 다하려는 남편을 보며 모든 걸 잊으려고 하지만, 내 마음에 맺힌 상처가 사라지지 않는다.
나의 아픈 과거는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삶은 때로 우리를 시험하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힘을 발견하게 된다.
아픔도 잠시, 나는 뱃속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시 앞을 향해 나아가는 불꽃이 되었다. 이러한 시련을 겪으면서 나는 남편을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남편도 분명 나와 다른 방식으로 나만큼 힘들었을 거로 생각한다.
내가 겪은 시련은 엄마인 나를 꺾지 못했다. 오히려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고 엄마로서 내면의 힘을 길러주었다.현재 유방암이라는 중병으로 긴 세월을 살고 있지만, 잘 커 준 아들딸이 주는 행복은 그때의 내 결정이 현명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