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작가님이 쓰신 “흙수저를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글은 나의 삶과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문장들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읽으면서 모든 내용이 공감되었고, 현실을 잘 정리해 준 글이었다.
나는 가난의 구렁텅이에서 출발하여, 사회적 지원의 불평등과 개인의 노력 사이에서 헤매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어릴 적, 가정의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를 도와주는 손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때만 해도 사회복지가 발달 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가난하고 못 배운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곳은 없었다.
어쩌면 우리가 무지해서 있어도 찾아 먹지 못했을 수 있다. 정책도 정보가 있어야 하고 거기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만 그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다. 또한 남을 의식한 우리 문화가 어릴 때는 알아도 도움을 받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현대에 와서는 받을 수 있는 복지혜택이 있다면 무조건 받고 본다. 알면서도 안 받는 건 바보 취급을 받는 시대가 되었다. 예전에는 나라에서 주는 걸 받으면 “오죽 못났으면 받을까?”라는 사람들의 편견이 심했다. 지금 말로 왕따를 당했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나라에서 나에게 주는 혜택이 없나?’하고 찾아보며 정보를 공유하는 시대가 되었다. 몰라서 못 찾아 먹는 사람들을 바보라고 말한 정도로 인식이 바뀌었다.
사회복지의 발달로 많은 혜택이 있는 현실에서, 필요한 혜택을 찾기란 여전히 미로와 같다. 정보가 있어도 그 문턱을 넘기 위해선 또 다른 지식이 요구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내가 암에 걸리고 어떤 혜택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오직 의료보험에서 산전 특례의 혜택을 받아 병원비의 95%를 공단에서 지급하고, 내가 내는 비용이 5%인 것만 알고 있었다.
병원에 다니면서 환자들이 하나씩 말해주면서 여러 가지 혜택이 있다는 걸 알았다. 지금은 알아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우선 내가 병원비를 낸 금액 중, 의료보험이 되는 비용을 일 년에 200만 원까지 환급해 주는 제도가 있었다.
나는 그런 혜택을 손에 넣기까지의 가정이 순탄치 않았다. 전화를 돌리고, 관공서의 문을 두드리면서, 때로는 허탈감에 가득찬 채로 도중에 포기하고 싶었다. 몇 군데를 전화해도 제대로 아는 부서도 설명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다 보건소에서 한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갔지만, 거기서도 “여기로 가라, 저기로 가라.” 무슨 똥개 훈련 받는 느낌이었다.
나중에 부서를 찾아 신청하면서 짜증을 낸 기억이 난다.
“이런 법이 있다는 걸 알아도 일반인이 신청해서 받기엔 너무 벅차요. 여기까지 오는데 며칠을 알아본 줄 아세요? 이렇게 복잡하면 우리 같은 서민이 어떻게 혜택을 받습니까?”라고 물었다.
보건소 직원도 웃으면서 내 말을 인정하며 처리해 주었다. 그 과정에서도 보완할 서류들이 적지 않아 여러 번 갔던 기억이 난다. 그 혜택마저도 3년이 지나자 사라졌다. 계속 암이 재발하자, 지급 거절이 나왔다. 이렇듯 정책이 있어도 아는 사람이 아니면 혜택받기는 쉽지 않다.
의료보험 공단에서는 장애 등급으로 장애 연금이 나오는 것도 있었다. 이것 또한 누구도 암에 3번 걸릴 때까지 알려준 곳이 없었다. 산전 특례를 받으면 분명 기록에 올라가 있을 텐데 어디에서도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깨달았다. 아무리 많은 정책과 혜택이 있어도 정보를 찾는 것과 그 정보를 활용하는 것은 개인의 몫이었다.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사회적 지원을 이용하려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불평등은 여전히 존재했다.
실제로 사회복지 혜택은 종종 악용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로 인해 실제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도달하지 못하는 현실을 목격했다.
병원에서 나와 같이 유방암에 걸린 동생이 있었다. 동생 엄마도 암이라고 했다. 다행히 동생은 실비 보험이 있어 병원에서 모든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난 그 동생을 보면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생은 암 치료도 끝났고 몸도 좋아졌지만, 일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직 나라에서 주는 혜택을 받고 싶어 했다. 기초수급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라 정책에 화가 났다. 기초수급자에게 주는 혜택은 힘든 사람들을 위해 만든 제도이다.
나이도 이제 40대 초반인 여성이 미용 기술은 있어도 힘든 일 하기 싫다며 세금 내지 않는 아르바이트만 골라 하면서 기초수급자의 조건을 만든 거다. 나에게 자랑하는 그 친구를 보면서 정책은 왜 서류만 보고 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번은 아는 분들과 식사하는데 한 분의 말씀에 기가 막혔다. 그분은 자신은 위장이혼을 했다며 자랑했다. 나는 왜 그래야 하냐고 묻었다. 아이들을 위해 한부모 가정에게 주는 혜택을 받기 위서라고 했다.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난 그렇게 이혼하고 싶었어도 그런 이유로 이혼한다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음으로써 정말 혜택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지 못하고 엉뚱한 사람들에게 더 많이 가는 게 복지혜택이라는 걸 알았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젊은 사람들은 왜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가난은 노력하면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 있다고 본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재벌은 되지 못해도 중상류까지는 노력하면 얼마든지 올라갈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 교육은 고등학교까지 무상이다. 급식까지 모든 걸 다해준다. 지금은 교복비도 지원해 준다. 공부할 마음만 있다면 장학금까지 받으면서 다닐 수 있다.
아들 말로는 고등학교에서 전교 일 등 한 학생이 작년에 7백만 원이 넘는 장학금을 받았다고 했다. 이처럼 공부만 잘해도 살길이 있다.
형편이 어려워 학원에 다니지 못해 공부를 못한다는 학생이 있다. 학원에서 배우는 거 별로 많지 않다. 학원을 10년 운영해 본 나의 경험이다. 지금은 공부할 마음만 있으면, 학교에서 탭도 지원해 준다. 무료로 하는 좋은 강의들도 많다.
공부에 실패했다면, 다른 길을 찾으면 된다. 세상은 성적순으로 살지 않는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우선 마음가짐부터가 달랐다. 단순한 일이라도 생각하며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아르바이트라는 단순한 일을 할 때도 더 효율적인 방법을 생각하며 일하는 사람은 계속 그 일을 하지 않는다. 고용인은 자신에게 득이 되는 사람을 알아보기 마련이다. 효율적이고 매출을 올리는 사람에게 그만한 대우를 해줄 수밖에 없다.
능력은 어느 자리에서든 키울 수 있다. 반면, 발전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 아무 생각 없이 시키는 것만 한다. 그것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그러면서 왜 자신의 가난만 탓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세상이 바뀌거나, 나를 도와줄 곳을 찾기보단 능력을 키워 자신의 환경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게 더 빨리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세상은 노력하는 자가 더 많은 것을 얻는 세상이라고 본다.
나는 우리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민해야 할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하고 싶다. 우선, 사회적 지원 시스템의 접근성을 높이고, 그 과정을 간소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보의 접근성은 물론, 신청 과정의 단순화를 통해 실질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쉽게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시스템의 투명성을 높이고, 사회적 지원이 올바르게 배분되도록 감시하는 체계가 마련되어야 한다. 악용되는 사례를 줄이고, 실제로 필요한 이들에게 지원이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도, 개인의 노력과 자기 계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사회적 지원은 한계가 있으며, 결국 개인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은 그 사람의 노력과 의지에 달려있다.
2024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