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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경 Jul 23. 2024

사우나에서 발견한 통증 완화의 비결 : 병원 치료 여정

  

사람은 어려움 속에서 작은 행복과 위안을 찾으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통증과 화장실을 자주 가는 야뇨 증상으로 지친 나는 며칠간 편안한 잠을 잘 수 없었다. 하지만 항상 엄마를 걱정하던 딸의 보살핌 속에서 오랜만에 깊은 잠에 잠시 취하고 일어났다.      




고통을 참기 위해 기를 쓴 나는 아침에 눈을 뜨자, 온몸은 땀에 젖어 있었다. 입원 준비를 해야 했지만, 우선 몸부터 씻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사우나 가고 싶다! 병원 가면 더 씻지 못할 텐데!”


“나도 땀으로 다 젖었네.”     


“더운 밤에 엄마 때문에 창문도 못 열고 딸이 불편했구나! 같이 동네 사우나라도 잠깐 다녀올까? 시간이 빠듯하겠지만 가서 때 밀고 오자!”라는 나의 말에 딸은 급하게 목욕 준비를 했다.     


우리는 최대한 가까운 동네 목욕탕으로 향했다. 한쪽 팔을 사용할 수 없는 나는 딸이 옷을 벗겨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우나에 들어가서도 딸이 비누칠을 해주어야만 했다. 움직일 때도 딸은 내 옆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부축해 주었다. 나는 때 밀어주시는 분들에게 우리 둘을 부탁했다.     


머리도 감겨 달라고 했다. 머리 감는 게 5,000원 추가라는 말에 딸은 자신이 감는다고 하자, 아주머니는 딸에게      


“나 돈 벌게 너도 감으면 안 돼? 엄마가 해준다잖아!”라며 아주머니는 애교스럽게 딸을 꼬시고 계셨다. 나는 웃으면서 그러라고 했다. 때를 미는 동안 아픈 팔의 통증이 줄어드는 걸 느꼈다. 처음에는 따뜻한 물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집에 와서 급하게 아점을 먹고 형부의 도움을 받아 병원에 갔다. 강한 진통 주사를 맞아도 효과가 없었던 통증이 오늘은 진통제가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병원 가는 동안 참을만했다. 도착해서도 딸과 형부가 짐을 옮기는 동안 견딜만했다. 짐 정리가 끝난 후 딸과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통증이 왜 줄었을까? 무엇 때문일까?”     


“매일 엄마 아픈 곳, 뜨겁게 해서 마사지를 그렇게 해도 아파했는데?”     


“때를 밀 때 온몸 전체를 구석구석 밀어주잖아? 전신 마사지 효과가 있잖아? 그거 아닐까?”라고 말하자,      


“그럼, 오늘부터 마사지를 전신에 해보자.”라며 딸은 큰 발견을 한 듯 기뻐했다. 짐 정리가 끝나고 딸은 마사지를 하자며 자기 침대를 정리했다.     


다행히 병원의 배려로 2인실을 우리만 사용할 수 있었다. 딸에게 빈 침상을 사용하도록 허락도 했다. 내 침대에는 주열기부터 매트까지 나의 치료 기구들로 가득했다. 딸은 자신의 침대에서 하자며 나를 위한 마사지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기계로만 마사지를 하자, 내 몸의 온도가 낮아 기계의 높은 열을 빼앗았다. 60도로 시작해도 20분 정도가 되면 44도 정도로 내려왔다. 일반인이라며 44도가 적당하지만, 나는 따뜻함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온도였다.     

“엄마! 온도가 올라갈 때까지 손으로 주물러 줄까?”라며 딸의 뜻밖의 제안에    

 

“우리 이쁘니 힘들지 않을까? 엄마야 그걸 원하지만, 그러면 힘들잖아?”     


“나 손 아귀힘도 좋고, 기운이 넘쳐.”라며 내 팔부터 몸 전체를 구석구석 만져 주었다. 부드러운 손길이 나의 모든 피로를 풀어주었다. 등을 할 때는 내 엉덩이에 앉아서 해달라고 하자, 전문 마사지사보다 더 시원하게 눌러 주었다. 감사했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전신 마사지와 파라핀, 뜸치료 등 여러 가지 치료를 쉬지 않고 이틀 정도 하자, 극한 통증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독한 진통제에 의존하는 것을 멈추었다. 통증으로 힘들어하는 내 모습에 딸은 수시로 내 팔을 주물러주었다. 심한 통증을 겪은 나는 기운이 없었다. 속은 메스껍고 먹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주말을 어떻게 보냈는지 월요일이 되었다. 양방 협진을 의뢰했지만, 오전만 근무인 주치의 교수님은 나를 부르지 않았다. 딸과 나는 간호사실에 10번은 간 것 같다. 드디어 오후에 병실로 오신다는 회답이 왔다.     


통증으로 며칠을 자지 못한 나는 잠깐 잠이 들었다. 그때 주치의 교수님이 오셨다.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써도 오른팔과 어깨를 움직일 수 없었던 나는 혼자 일어날 수 없었다. 기를 쓰는 나의 모습을 보시는 선생님은 너무 담담하게


“그냥 누워계세요! 괜찮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고통이었어요.”라고 말하자, 교수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만 끄덕이셨다.     


“검사를 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무슨 검사를 원하세요?”라는 교수님의 말씀에 나는 황당했다.     


“PET CT도 찍고 Bone 스킨도 하고, MRI, CT, 피 검사 등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요?”라며 황당하다는 듯이 말하자,     


“항암치료 하지 않을 거잖아요?”


“지금, 이 몸 상태로 어떻게 항암치료를 해요?”


“그러니까요? 검사해서 확인이 의미가 있나요?”라는 발언이 나를 황당하게 했다.     


“상황을 알아야지요? 어떤 상태인지는 알아야지요? 이렇게 아프면 못살아요.”라고 단호하게 말하자,     


“PET CT만 찍으면 될 것 같아요.”


“피 검사는요? 기본 피 검사는 아무 이상이 없던데?”     


“아직 조직까지 퍼지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러니 피 검사는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PET CT만 찍어봅시다.”라는 교수님 말씀에 화요일에 PET CT를 찍기로 했다.      


이번 경험을 통해 나는 모든 병은 한가지 만으로 치료할 수 없다는 것과 어디서 어떻게 시너지 효과를 나타낼지 모른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사람이 살아 있는 것과 인간다운 삶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걸 통감했다. 고통 속에 사느니 죽음을 택하고 싶었다. 고통 속에서 남에게 의존하며 살아야 하는 건 인간다운 삶이 아니라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딸의 간병을 받으면서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사랑과 헌신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느꼈다. 앞으로 내가 어떤 치료를 어떻게 하며 “유방암 뼈 전이”라는 병을 이겨낼지 모르겠지만, 나의 긴 여정의 치료 과정을 적어보려고 한다.      


내 노력이 어느 정도이고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죽음을 선택하지 못한다며 최대한 긍정적인 마음으로 나의 치료를 위해 최선을 다해 나가려 한다.     


고통 속에서도 가족은 서로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기억하며 살아간다면 이겨내지 못할 게 없다는 걸 깨닫게 해준 시간이었다.     



 2024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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