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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경 Jul 25. 2024

사형선고 같은 진단 앞에서 : 딸의 희망 메시지

   

사람은 태어나면 누구나 죽는다. 이것은 변할 수 없는 진리이고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는 상황에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중병에 걸리면 아무도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없다. 오직 본인만이 느끼고 감당해야 하는 고통이다.      


유방암으로 10년 넘게 투병하면서도 나에게 죽음이 이렇게 가까이 올 거라고는 상상해 보지 않았다. 몸에 힘이 없고 기력이 쇠해 병원에 모든 걸 의지하면서도, 죽음의 그림자가 내 곁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했다.     




화요일 아침, PET CT를 찍기 위해 핵의학 실로 딸과 함께 내려갔다. PET을 찍기 전에 우선 방사선을 정맥 주사에 투입한다. 투입 후 검사실 안에 있는 침대에 누워 한 시간 정도 약이 몸에 퍼지기를 기다린다. 환자에 따라 부작용이 있을 수 있어 검사실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다.    

 

그때 나는 있을 수 없는 몸의 변화를 느꼈다. 주사를 맞은 지 5분 정도 지나자, 어깨 날개뼈에 있던 가장 심한 통증이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딸! 엄마 갑자기 날개에 있는 통증이 줄어들고 있어. 항상 제일 아파했던 곳 있지? 만져봐 봐!”라고 말하자, 딸은 웃으면서 손을 뻗어 어깨 아래의 날개뼈를 만지더니,     


“어디 보자. 여기? 어! 정말 작아진 거 같은데?”라는 말에 나는 웃으면서     


“장난치지 말고, 어디인지 알지? 제일 아프다는 곳!”     


“안 다니깐. 튀어나온 곳이 정말 작아졌어. 신기하네!”라며 딸은 그 부위를 꾹꾹 눌렀다.     


“이게 통증을 줄여주는 방사선도 아닌데? 정말 신기하네? 어떻게 이 방사선에 암이 줄어들고 통증이 줄어들지?”     


“엄마! 그렇다고 이 방사선 또 맞는다고 하면 안 돼!”라며 딸은 웃으면서 경고했다.     


“안 맞아! 걱정 마세요! 말해도 믿지도 않을 거고, 놔 주지도 않을걸? 항암 방사선도 안 하면서 헛소리한다고 할 거다.”라고 말하며 우리는 아무 걱정 없는 즐거운 모녀처럼 웃고 있었다.     




수요일에 검사 결과를 듣기 위해 양방 유방외과 교수님께 다시 협진을 요청했다. 하지만 역시나 불러주질 않았다. 양한방 같은 병원이라 한방에 입원해서 빠른 검사와 결과를 보기에는 좋지만, 협진 교수님 한번 만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간호사실에서도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성질 급한 나는 진료실로 직접 내려갔지만, 문이 잠겨 있었다. 끝내 수요일에 교수님을 만나지 못했다. 답답해하는 나에게 간호사님이 PET CT 사진을 보여주었다.      


동작이 빠른 딸은 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판독을 위해 인터넷을 찾아보았지만,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전에 다닌 한방병원 한의사님께 물어보아도 확실한 답변을 주지 않았다. 그때 간호사실에서 연락이 왔다. 교수님께서 내일 아침 일찍 오신다고.     


“딸! 엄마 주위에 이걸 판독해 줄 의사가 없다는 게 참 답답하다. 엄마 인맥이 이렇게 좁은 줄 새삼 느끼네.”     


“내일 아침에 오신다고 했으니깐 그때까지 기다려 보자 엄마!”라고 말하는 딸도 인터넷만 뒤지고 있었다.     

 



우리는 이런저런 상상을 하면서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교수님을 8시 50분쯤 오셨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어제 많이 기다렸는데 바쁘셨나 봐요?”라고 웃으며 말하자, 교수님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신 후,      


“어떻게 설명드릴까요?”라며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영상을 보면서 설명 듣고 싶어요.”라고 말하자, 교수님은 그러자며 간호사실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여기 보시면 오른쪽 어깨와 날개 쪽에 암이 크게 있구요. 양쪽 대퇴골에도 암이 있습니다. 그리고 유방에도 이상 소견이 있네요.”     


“유방에도 있나요? 그럼, 유방은 어떻게 해요?”     


“지금 유방에 있는 게 문제가 아니지요.”라며 온몸의 뼈에 있는 암의 심각성을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었다.     


유방암이 처음 진단되었을 때는 유방에 조그마한 혹이나 이상 소견만 보여도 큰 충격으로 받아들였지만, 지금은 뼈로 전이 된 상태라 유방의 이상 소견 정도는 비교할 수 없다는 말씀이었다.     




“선생님! 작년 Bone Skin 검사에서 분명 이상 소견이 나왔는데 결과를 보러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연락이 없었다는 게 이해가 안 돼요?      


교수님! 제가 본병원에서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제 병에 대해 방치하는 건 아니거든요. 해마다 정기 검진도 받고, 저 나름대로 큰 비용과 시간을 들여 치료하고 있거든요.      


앞으로도 검사하고 깜박해서 결과 보러 오지 않으면 이상 소견이 있어도 병원에서 연락 주지 않나요?”라고 말하자, 고개를 끄덕이시며,     


“그런 문제들이 있어 올해부터는 이상 소견이 있으면 연락을 주는 것 같긴 한데 오시지 않으면 놓칠 수 있어요.”라며 작년에 발견된 걸 알려주지 않은 사실을 내 잘못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나는 이해되지 않았다. 이 병원에 다닌 지 벌써 10년이 되었다. 해마다 정기검진하고 문제가 있으면 수술도 여기서만 세 번이나 했다. 그런데 결과를 들으러 오지 않았다고 뼈 전이처럼 중대한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는가?     


하지만, 현재 나는 약자다. 앞으로 이 교수님을 만나지 않을 거라면 지랄해도 되겠지만, 계속 주치의로 대해야 한다면 최대한 기분 상하지 않게 대화를 이끌어 가야 했다.

     



“만약 원하시면 종양내과로 전과해 드릴 수 있어요.”     


“아니요. 저는 교수님과 계속할게요. 혹시 제가 마음이 변해서 항암치료를 하게 되면 그때 말씀드릴게요.”라고 말하자 고개를 끄덕이셨다.     


“교수님! 제 변명이 정확히 뭔가요? 정말 골수암인가요?”     


“유방암 뼈 전이요.”     


“새로 생긴 거 일 수도 있잖아요?”     


“그걸 알려면 수술해서 조직을 떼어 검사해 봐야 해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구요. 그러면 유방암 뼈 전이인 거네요?”     


“그렇지요.”     


“제가 항암치료를 하지는 않지만, 제 상태를 계속 관찰해야 할 거 같은데 얼마 만에 검사를 받을 수 있을까요?”     


“3개월 후에 다시 받으실 수 있어요.”     


“그때도 PET CT를 찍을 수 있나요?”


“안될 거예요. Bone Skin이나 MRI, CT 등으로 검사해야 해요.”     


“제가 알기로는 MRI나 CT는 뼈까지 몸 전체를 검사 할 수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사비로라도 PET CT를 찍으면 어떨까요? 그게 정확한 거 같은데?”     


“안될 거예요. 나머지 검사들도 뼈까지 전체를 볼 수 있어요.”라며 나의 근심을 덜어주셨다.     




다음 진료일에 국민연금 공단에 낼 몇 가지 서류를 발급 받기 위해 선생님을 다시 만났다. 그때 나는     


“선생님. 뼈암 치료제가 인터넷을 보면 데노수맙과 졸레드론산 등 여러 가지 약이 있는데 이런걸 먹으면 어떨까요?”     


“이런 건 마지막에 쓰는 보조제입니다. 항암제를 이것저것 써서 맞는 항암 약을 찾아야지요.”라는 말씀에 나는 속으로


‘내가 무슨 마루타야? 그 독한 항암제를 이 약 저 약 써보게?’ 결론은 죽을 때까지 항암제를 바꿔가며 해보자는 건데, 난 조금이라도 덜 고통받고 죽는 걸 택하고 싶었다.     


“선생님! 제가 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나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암이 번지는 상황을 봐야지요.”     


“그래도 평균 수명이라는 게 있잖아요.”라고 묻자, 그저 미소로만 침묵하셨다.      


“윤사랑 외과의원”의 블로그에서는 뼈 전이 환자의 중앙 평균 수명을 20개월로 보고 있었다. 거기에 대입하면 나는 벌써 1년 이상을 살았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앞으로 얼마나 산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의학적으로 얼마 살 수 없다는 사형선고를 받아들여야 하는 나는 쓴웃음이 나왔다. ‘내가 정말 죽을까?’ 눈으로 확인하고 아프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      


진료실에서 함께 나오는 딸은 웃으면서,


“엄마! 점쟁이가 엄마 90살까지 산다고 했잖아! 걱정하지 마! 엄마가 얼마나 운이 좋고 목숨이 긴 사람인데.      

내가 성심당 갈 때 알았어. 빗속을 운전하면서 내가 사고를 몇 번이나 낼 뻔 했는 줄 알아? 그래도 엄마는 옆에서 잘 자더라고. 그때 알았지. 엄마가 오래 살 거라는 걸.      


그리고 엄마 옆에 있으면 일이 잘 풀려. 알잖아? 그래서 나는 평생 엄마 옆에 있을 거야. 절대 걱정하지 마. 엄마!     


엄마는 점쟁이 말대로 앞으로 40년만 더 살아. 지금부터 내가 세어줄게. 40 X 365일 하니깐 14,600일이야. 오늘부터야. 알았지.”라며 애교스럽게 이야기하며 나를 부축해 병실로 올라왔다.     


2024년 7월 초부터 죽음을 선고받아 기분은 더러웠지만, 딸의 희망적인 메시지를 들으며 올라온 나는 앞으로 하루하루에 감사하며 살기로 다짐했다. 얼마 살지는 모르겠지만, 딸과 보내는 이 순간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과거의 미련과 미래의 두려움을 뒤로하고, 나는 살아있는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행복하게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2024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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