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우리나라 고유의 명절 추석이다. 많은 이들에게 명절은 기다려지는 연휴이자, 가족이 모이는 따뜻한 시간이다. 학생들은 학교를 가지 않아 좋고, 직장인들은 휴가만큼 긴 연휴를 즐길 수 있어 반갑다.
요즘 젊은 부부들은 명절을 즐겁게 보내는 경우도 많지만, 아직도 나이 드신 부모님들은 명절만큼은 모든 가족이 모여 지내고 싶어 하신다. 그 힘든 음식 장만은 집안 여성들이 도맡아 희생한다. 결혼한 여성의 절반은 다가오는 명절이 반갑다기보다는 고통스러운 지옥의 시작으로 받아들인다.
나 역시 결혼 후 시댁에서의 명절은 전쟁 같은 시간이었다. 시부모님께서 살아계실 때는 태안에 모두 모여 음식을 장만했다. 그때마다 형님들의 불만을 들으며 나는 눈치껏 지내다 온 기억이 난다.
시부모님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큰 아주버니 댁에 모여 명절을 보냈다. 항상 불만이 많은 큰형님은 우리가 와도 불만, 오지 않아도 불만이었다. 그 순간만 잘 지내고 오면 된다는 주위인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 무심한 뒤엔 피로감과 억눌린 감정들이 쌓여가고 있었다.
둘째를 낳고 남편과 잦은 다툼은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끝없는 다툼 속에서 정말 참기 힘들었던 나는 어린 아들딸을 두고 집을 나간 적도 있었다. 남편이 나를 찾을 거로 생각했지만, 자존심이 강한 남편은 나를 찾지 않았다.
나도 남편과 끝내고 싶었지만, 아이들을 혼자 키울 자신이 없었다. 이혼하면 분명 아이들은 보육원에 보내야 했다. 자신밖에 모르는 남편이 경제활동을 하면서 혼자 키우진 못할 거다.
우리 친정도 자식에게 관대한 집안이 아니었다. 남의 시선을 중요시 생각하는 부모님이 이혼녀인 나를 받아 줄리 없었다. 나 또한 이혼녀라는 사회적인 부정적 시선을 달고 경제적 활동을 하면서 어린 두 자녀를 키울 자신이 없었다.
둘째를 낳은 후 첫 명절을 큰 아주버니댁에서 지냈다. 전날 음식 준비가 끝나자, 여자들끼리 술 한잔하자고 둘째 형님이 제안했다. 결혼하고 처음 있는 여자들만의 모임이었다. 어린 아들은 남편이 보고, 나는 3살짜리 딸을 데리고 나갔다.
시원한 생맥주에 속이 확 풀린 나는 기분이 좋았다. 며느리 세 명이 모이니 시댁 식구 헌 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때 작은 형님이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동서! 둘째를 왜 나았어? 나이도 있는데 어떻게 키우려고?”
“왜요? 그래도 딸도 있고 아들도 있으면 좋지요? 누가 또 뭐라고 해요?”
“학원 하면서 힘들잖아. 딸도 우리집에 맡기고 힘들었잖아?”
“무슨 일 있었어요?”
“이 집 누나가 둘째를 누가 키워줄 사람 있냐고 하면서 걱정하더라고. 그래서 ‘누가 키우냐고 지네 자식 지네가 키워야지?’라고 말하니깐, 키울 능력도 안 되면서 낳아서 우리 동생 죽인다고 난리더라고! 밤에 잠 못 잔다고?”
“우리 동생이라니요? 우리 남편을 말하는 거예요?”
“그렇지! 이 집 누나가 동생들한테는 끔찍하잖아!”
“수업도 4시 넘어야 나오면서 밤에 아이 보고 낮에 자면 되지! 쓰지도 못할 영어책 쓴다고 잠도 안 자고 사람 미치게 하는 게 누군데요? 내가 아들은 낳아서 자기 동생을 죽인데요? 아니 늦게 결혼해서 이 나이에 아들딸 쑥쑥 낳아 주었으면 고마워해야지! 뭐가 어째요? 어쩌면 이렇게 말을 함부로 하지? 그럼, 자기들은 왜 자식을 둘씩 낳았는데 안 죽었데요?”라며 나는 흥분해서 소리 지른 적이 있었다.
시댁에선 내가 둘째를 낳아 남편을 힘들게 하고, 마치 내가 남편의 삶을 갉아먹는 존재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용서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그날 밤, 잠이든 어린 딸을 업고 돌아오며 느낀 비참함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중에 남편에게 이 일을 털어놓았을 때, 내가 없는 말을 지어낸다며 그는 오히려 나를 비난했다. 불리하면 그런 적 없다며 발뺌하는 이 집 식구들. 그들 속에서 나는 늘 외롭고 서러웠다.
둘째 낳고 아무도 쳐다보지 않던 시댁 식구들은 남편 생일이라며 3남매가 식사하고 산후조리원을 찾아왔다. 그들의 방문은 나에게 큰 상처로 남았다. 내 귀한 아들에게 미친 시누이는,
“아니 이 아기는 우리를 전혀 닮지 않았네?”라며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황당한 나머지 그들의 말에 대꾸할 힘조차 없었다. 그들 남매는 나가면서 50,000원이 든 봉투 하나만 남기고 돌아갔다. 내 아들에게나 나에게 그 어떤 진심도 담기지 않는 방문이었다.
‘감히 내 귀한 아들에게 한다는 소리가 아무도 닮지 않았다고? 그럼 내가 나가서 애를 나왔다는 소리야? 50,000원은 왜 주고 지랄이야. 내가 거지야?’라며 혼자 괴로워했었다.
몇 년 후, 큰 아주버니와의 통화는 또 다른 상처를 남겼다. 그때도 남편과 싸우고 집을 나왔을 때였다. 아무것도 몰랐던 아주버니는 나의 한탄을 들으시다가
“제수씨! 아버님이 알코올 중독 이셔서 힘드셨다더니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세요?”라며 나를 정신적인 문제를 가진 사람으로 취급했다. 나는 더 이상 그들의 무지와 오만함에 참을 수 없었고, 폭발하듯 감정을 토해냈다. 그동안 참아왔던 모든 분노가 그 순간 터져 나왔다.
“뭐라고 했어? 지금! 그래서 잘난 당신 동생은 임신한 와이프를 이유 없이 때리고, 뚝 하면 폭력을 쓰냐? 이게 잘 배운 집안에서 하는 행동이야? 이 미친 새끼들이 정말! 야! 내 집에서 ‘의성 김가’ 세 명 다 데리고 나가! 그렇게 귀한 동생, 내 집에서 데리고 나가! 어디서 우리 부모님을 들먹거려! 그리고 내가 아들을 낳아서 너희 동생을 죽인다고? 그럼! 당신은 왜 안 죽었어? 당신네도 아이가 둘이잖아? 어디서 말이면 단 줄 알아? 내가 진단서 발급받아 네 잘난 동생 가만히 안 둘 거야!”라며 미친 듯이 소리친 기억이 난다.
이 모든 과정을 겪으며, 나는 결국 몸과 마음이 지쳐버렸다. 이 틈에서 얻은 건 죽음을 부르는 “암”. 11년간의 암 투병은 나를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얼마 전 딸은 나에게 말했다. 어린 시절, 엄마가 아프다며 병원에 가면서 집안이 조용해졌다며, 그때부터는 엄마가 병원에 안 가면 아빠가 갔으면 했다고.
이제는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컸다. 아이들이 판단하는 우리 집은 엄마 아빠가 함께 있지 않기를 바란다는 거다. 그러면서도 이혼만은 안 했으면 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마음이 무겁다.
요즈음 나는 치료에만 집중하며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병원에서 혼자 지내는 명절이 시댁에 가는 것보다 나에게는 편안한 시간이 될 것이다.
뼈 전이로 ‘짧으면 2달’이라는 진단을 받았음에도, 시댁 식구들은 여전히 누구 한 명 전화 한 통 없었다. 그들에게 더 이상 기대할 것도 없다. 남편조차도 자기가 불러들인 구더기를 나 보러 치우라고 하는데 이런 사람들에게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좋은 날, 왜 이렇게 나쁜 기억들만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내 마음에 아직도 남편에 대한 원망을 다 떨쳐내지 못했기 때문일까? 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상처와 아픔이 다시금 떠올라 나를 괴롭힌다.
그래도 멋지게 자라준 자랑스러운 아들딸이 있기에, 나는 그들에게 내 나름의 통쾌한 복수를 했다고 생각한다.
이 가정을 지키기 위해 나는 나 자신을 희생해 왔다. 이제는 내 치료를 위해, 내 삶을 조금이라도 통증 없이 편안한 시간을 갖기 위해 노력하려 한다. 지금 나의 치료가 반응을 보이고 나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내일은 모든 가족이 인천 큰집을 다녀와 나에게 올 것이다. 오랜만의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이번에는 조금 더 따뜻하고 평온하길 바라며, 오늘밤 나는 조용히 기도해 본다.
2024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