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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경 Oct 08. 2024

병원 밖 외출 : 삶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감사의 가치


세상은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가르치지만, 바쁜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은 감사보다는 불만에 더 쉽게 마음을 빼앗긴다.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지를 깨달은 나는 매 순간 숨을 쉬며 감사한다.   

  

나 또한 감사는커녕 현실에 대한 불만과 좌절로 보낸 날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다 4번째 암이 찾아오면서, 나는 비로소 감사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감사를 모르던 사람은 아니었다. 생각 없이 말하고 무심한 남편이 미웠고, 원하는 만큼 성적을 올리지 못하는 아들이 걱정스러웠다. 또한 큰돈을 벌고 싶다는 욕심에 가득 찬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이 한심스러웠다. 이처럼 내 삶은 만족할 수 없는 것들의 연속이었다.     




3년 전, 세계는 “코로나”라는 거대한 전염병에 휩싸였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백신을 맞고 이상 증세를 느꼈을 때, 4번째 암이 내 몸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수술을 받았지만, 예전처럼 몸이 회복되지 않아 점점 약해져 가는 몸을 주체하기 힘들어졌다.     


작년 가을부터 찾아온 어깨 통증과 다리 통증은 더 이상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거기에 생리 또한 빨라진 주기에 많은 양의 출혈은 나의 생존을 위협하였다. 그때까지도 나는 천년만년 살거라 생각했는지, 돈만 쫓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지난 4월 의사는 나에게 ‘골수암’일 가능성이 높다며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할 때도 나는 코인 선물에 손을 대면 돈에 욕심을 부렸다. 그러다 6월 말, 인간으로서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몰려왔다. 죽음이 뭔가를 깨닫게 되었다.      


아이들은 학교로 남편은 직장으로, 혼자 집에서 고통에 몸을 웅크리며 꼼짝하지 못하고 울고 있었지만, 배꼽시계는 울렸다. 일어나 음식을 먹고 싶었지만, 움직일 힘이 없었다. 배달 음식이라도 시키고 싶었지만, 그것조차 받을 힘이 없었다. 돈이 있어도 건강이 없으면 배가 고파도 굶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때 뼈저리게 느꼈다.      


통증은 날이 갈수록 더해가면서, 배가 고파도 음식을 넘길 수가 없었다. 독한 약은 구토와 가슴까지 답답하게 만들었다. 엄마를 살리겠다는 딸은 아침저녁으로 마사지를 해주며 통증을 줄여주려 애썼다.     




나는 더 이상 살아갈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죽음만이 이 고통을 끝내는 방법이라고 여겼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야 하나? 농약을 먹을까? 어떤 것이든 한 방에 끝내야 하는데? 병신이 되면 더 비참해지는데!’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살고 싶다는 욕망이 나를 붙들었다. 나는 나만의 치료법을 찾아나가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병원 생활을 하면서 많은 암 환자들이 항암치료나 병원 치료로 고통받다 끝내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마다 결심한 게 있었다. ‘혹시 나에게도 마지막인 뼈암이 온다면, 항암치료가 아니라 열 치료를 선택하겠다.’ 그러면서 나는 열 치료에 필요한 기구들을 하나둘씩 사 모았다. 지금이 그때다. 어떤 기계가 나에게 맞을지 생각하며 치료해야 한다.     


나는 나의 모든 기구를 꺼내 이것저것 해보았다. 1달간의 긴 치료 여정 끝에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했다. 우선 발 고주파와 일라이트 장판을 이용해서 열을 주입해 주었다. 이 치료가 효과는 좋아도 고주파의 전력이 강해 하루에 1~2번 이상 할 수 없다.      


일라이트 매트는 무거워 팔과 다리가 불편한 내가 막 사용하기가 힘들었다. 가벼운 매트를 하나 더 구입했다. 또한 주열기는 한 부위를 집중적으로 열을 넣어주기에 안성맞춤이다. 누워있을 때, 주열기와 가벼운 매트로 아픈 부위에 열을 넣었다.     


이때 제일 중요한 건 내가 체력을 유지하는 거다. 나는 예전 병원장이 파는 비싼 물과 기력을 올려주는 맞춤 한약은 물론 공진단과 경옥고, 영양제 등을 수시로 챙겨 먹었다. 이렇게 3개 월간 미친 듯이 치료에 전념한 나에게 결과가 보였다. 기적처럼 통증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약을 먹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글을 쓰고 싶어도 타이핑을 할 수 없었다. 딸은 핸드폰으로 기록만 하라고 했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외출은 꿈도 꾸지 못했다. 지금은 조금씩 일상의 기쁨을 되찾아 가고 있다.     


간단한 외출도 가능하다. 어제는 Bone Scan 검사를 위해 본 병원에 갔다. 지금 있는 병원에서 차량 지원은 되지만, 혼자 검사하기 위한 외출은 처음이었다.     


Bone Scan은 방사선 주사를 맞고, 3시간 후에 기계로 촬영한다. 3시간 동안 병원에 혼자 있을 곳이 없었다. 멀리 갈 수 없는 나는 병원 근처 카페에 3시간을 있자니, 힘들 것 같았다. 그렇다고 혼자 모텔에 들어가기도 어색했다.      


근처 사우나를 찾아보았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불가마 사우나가 있었다. 지팡이를 짚으며 조심조심 들어갔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천천히 걸었다. 오랜만의 사우나가 반가웠다. 우선 마사지 예약부터 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세신만 부탁했다.     


불가마에서 한 시간 정도 있었다. 미숫가루 한 통을 사 먹으며 새로운 행복을 느꼈다. 이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고 기쁨을 주는 외출인 줄 몰랐다. 할 일 없을 때, 시간 죽이러 간 곳이, 지금은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지팡이 없이 천천히 걷는 내 모습을 보며, 감사함을 느꼈다. 세신을 하기 위해 침대에 오를 때, 조심스러운 내 모습을 세신 언니는 신기하게 보셨다. 나는 웃으면서      


“언니! 조금만 천천히 누울게요. 제가 좀 아파요?”


“어디가? 아주 건강해 보이는데?”라며 어리둥절해했다. 나는 웃음을 잃지 않으며,     


“겉으로는 멀쩡하게 보이지만, 팔다리가 불편해요. 막 움직이면 아니 돼요.”라고 말해도 믿기 어려운 표정을 지으시며     


“어디가 아픈데?”라며 장난기 섞인 말투로 다시 물었다. 나는 더 환한 미소를 지우며     


“3달 전에 2달 판정받았는데, 지금은 기적처럼 이렇게 움직이네요.”라고 말하자, 언니의 표정은 심각해지면서도     


“20년은 거뜬히 살겠어. 얼굴 색도 좋고 몸도 좋아. 걱정하지 마! 웃기도 잘 웃네!”라고 장난스럽게 말하며, 따뜻한 격려를 건넸다. 조심조심 내 몸을 만져주는 세신사 언니 덕에 어깨의 통증이 한결 가벼워졌다.    

  



본 병원으로 들어가 검사를 마치자, 밖에는 병원 차가 기다려 주고 있었다. 행복감이 밀려왔다.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병원 밖에서 3시간 넘게 있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비록 지금은 지팡이에 의지하지만, 하루하루 좋아지는 내 모습을 보면, 이것마저도 곧 내 곁을 떠날 거라 믿는다.      


말기 암 환자지만, 이젠 나는 비참하진 않다. 통증이 줄고, 나의 생활이 하나씩 돌아오면서 예전보다 더 많은 행복을 느낀다. 지금 이글을 쓰며, 창밖에 달리는 차들을 볼 수 있다는 것과 지속되는 통증은 느끼지만, 숨을 쉬는 이 순간도 감사하다.     


암이 나를 찾아온 건 결코 축복은 아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중요한 것과 감사의 의미를 배웠다. 이제는 내 몸안에 있는 암조차도 미워하지 않는다. 그것이 내게 준 깨달음에 나는 더 깊은 감사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이 암을 허락하셨다고 생각한다. 이제 나는 그 깨달음을 안고, 남은 삶을 감사와 함께 살아갈 것이다.     


2024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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