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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경 Oct 30. 2024

희망과 절망의 경계 : 죽음을 선택하고 싶어요!(1)


기적이 왔다는 기쁨은 언제나 우리에게 방심을 알린다. 지난 6월 말 “유방암 뼈 전이”라는 진단과 함께 의사로부터 빠르면 2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살고 싶었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치료에 임했고 좋은 결과도 얻었다.     


매일 조금씩 좋아지는 어깨와 다리를 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는 암에게 속삭였다.     


“내가 좋아서 내 몸속에 들어온 암아! 우리 사이좋게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며 오래오래 공존하자. 내가 많이 사랑해 줄게. 그 사랑받으며 더 커지지 말고 통증 없이 오래 함께 살자!”      


암은 나의 칭찬을 듣고 응답하듯, 하루가 다르게 통증이 줄어들었다. 손바닥만 한 암 덩이가 있는 오른팔로 가끔은 탁구도 칠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한번 치고 나면 후유증이 커, 자제해야 했지만,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이러한 기적들이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3일 전 새벽 무서운 통증이 찾아왔다. 치료 후 욕조에 목욕까지 마치고, 편안히 누워 잠들 준비를 마친 밤까지 좋았다. 20분쯤 지나자, 암이 있는 왼쪽 다리에 심한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평상시 간헐적으로 느끼는 통증과는 확연히 달랐다. 암 주위의 사타구니 통증이 아닌 다리 뒤쪽에서부터 무릎을 지나 발등까지 참을 수 없었다. 새벽 3시가 되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간호사실에 연락했다. 진통 주사를 맞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를 악물고 7시까지 참고 싶었다. 깊은 숙면를 취하는 의사를 깨우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마음뿐. 새벽 5시가 되자, 다시 간호사실로 호출했다. 원장님께 봉침을 맞고 싶다고.   

  

달려온 원장님은 농도를 높여 맞자며 정성껏 놓아주셨다. 통증은 엉덩이와 허벅지 부분 일부만 사라지고 무릎과 장 단지, 발목과 발등은 더욱 심해졌다. 6시에 다시 원장님을 호출했다. 무릎에 봉침을 맞았지만, 통증은 더욱 심해졌다. 7시에 또 한 번 요청했다.     




두렵고 무서운 마음을 가족톡에 죽을 거 같다고 올리자, 딸은 톡을 보자마자 온다며 연락이 왔다. 마음이 급한 딸은 택시를 부르며 나에게 톡을 보냈다.     


“엄마! 엄마 돈으로 사치하면서 가고 있으니깐 기다려. 버스 대기시간이 30분 이상이라 택시 불렀어.”라는 글에 웃음이 나왔지만, 한편으로는 딸의 손길이 간절히 필요했다.     


너무 아픈 나는 딸이 도착할 시간만 재고 있었다. 딸은 도착하자마자, 옷만 갈아입고 3시간 동안 끊임없이 나에게 마사지를 해주었다. 사랑스러운 딸의 손길은 부드러움과 통증의 느낌이 교차하며 나에게 잠시 편안함을 주었다.      


그것도 잠시, 점심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더 세게 밀려드는 통증을 참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마약 직전의 진통제를 먹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15시간 이상 아팠던 나는 ‘내가 지금껏 받아온 모든 약을 먹으면 죽을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때 얼마 전 의사 선생님이 추천해 준 “비타민 B17”이라는 주사제가 생각났다. 다음날 있을 본병원 조직검사 후 맞으려고 준비해 놨던 거다. 그걸 맞고 싶다고 하자, 원장님은 2개의 앰풀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솔직히 어떤 효과를 기대한 건 아니었다. 약을 직구하면서 이것저것 알아보다 암 통증에 좋다는 글이 떠올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맞고자 했다. 하지만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주사를 맞자, 통증이 서서히 가셨다. 어떤 진통제로도 듣지 않던 통증이 신기하게도 멎었다. 주사를 빼자, 다시 통증이 찾아왔지만, 처음처럼 절망스럽지는 않았다.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신비의 약이었다. 멕시코의 한 병원에서 사용하는 암 치료제라고만 들었다.     




다음날, 본병원으로 조직검사를 위해 2박 3일간 입원해야 했다. 본병원 가기 전 불안한 나는 “비타민 B17” 주사를 오전에 맞고, 출발 전에 원장님께 봉침을 맞았다. 갈 때만 해도 절긴 했지만 걸어서 갔다.     


입원 후, 피검사와 X-Ray, 심전도 검사 등을 하고 병실로 오자, 몸이 의실거리며 추웠다. 병원에서 제공된 핫팩과 비상용으로 준비해 간 주열기로 몸을 데우긴 했지만, 불편한 낯선 침대와 병실은 참을 수 없는 통증을 불러왔다.     


최대한 참았지만, 6시가 되자,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처음으로 마약 진통제를 먹었다. 환각 상태로 빠져드는 듯했다. 그것도 잠시 심한 통증으로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눈을 떴다. 효과가 없었다. 6월 말 자살을 생각했던 통증과는 비교도 안 되었다.     


너무 놀라 간호사에게 말하자, 가장 강한 거라며 정맥 주사로 바꿔주겠다고 했다. 마약이 처음인 나는 무섭고 두려웠다. 마지막일 것만 같아 처음엔 거절했다. 그러나 참을 수 없는 통증으로 정맥 주사를 맞기로 했다.   

  

마약이 정맥을 타고 몸속으로 들어가는 동안 어지럽고 울렁거리며 잠이 왔다. 먹는 약보다 오랜 시간 환각 상태를 느꼈다. 처음 맞아보는 마약의 느낌이 ‘이런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뭉게구름 위에 떠 있는 기분이었다.      


환상 속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통증에 못 이겨 눈을 뜬 나는 다리를 움켜잡으며 통증을 진정시켜 보지만 움직이지 않는 다리는 나를 더 숨 막히는 고통으로 끌고 들어갔다.     


무서운 두려움과 공포가 머릿속을 휘감았다. 화장실을 가고 싶었지만, 다리가 움직이질 않았다. 옆의 사람이 깰까 조심하며 온몸을 비틀어 일어났지만, 걷기가 힘들었다. 화장실에 가자, 앉을 수가 없었다. 힘들게 볼일을 보고 일어나야 하는 엉덩이는 눈물로 나를 대신해 주었다.      


침대로 돌아왔지만, 다시 눕는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고통 속에서 몸부림을 치며 침대에 눕자, 온몸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나는 가족 톡에 “죽을 거 같아! 낼 아침 눈을 뜨지 않았음 좋겠어.”라고 올리자, 딸과 남편은 서로 오겠다며 답이 왔다.     


나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와도 대학병원은 들여보내 주질 않는다. 혼자 울고만 있었다. 더 이상의 마약 주사를 맞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자다 깨다'를 반복하자, 아침이 되었다. 선택식을 시킨 나는 시리얼에 우유를 부어 먹은 뒤, 금식에 들어갔다.     




4시에 조직검사를 한다는데 4시가 왜 이렇게 멀게만 느껴지는지? 결국 통증을 참지 못하고 1시에 마약 주사를 다시 맞았다. 미칠 것 같았다. 죽고만 싶었다. 환각에 빠진 나는 제발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통증으로 다시 깨어난 나는 눈물만 나왔다.   

  

검사 시간이 되어, 마약 진통제를 또 맞았다. 이젠 환각 상태로 빠지지도 않았다. 벌써 중독이 된 건지? 침대에 누워 검사실로 실려 가는 내 모습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검사실로 내려가자, 친구가 와있었다. 친구를 보자, 뭔가 안심이 되었다.     


차가운 검사실로 들어가자, 공포가 몰려왔다. 골수 검사를 처음 하는 나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엎드려 움직이면 안 된다며, 의사들의 바쁜 움직임과 잡담들이 떨고 있는 나에겐 소음으로밖엔 들리지 않았다.     


CT 촬영을 한 뒤, 의사 선생님은 18게이지 니들을 찾았지만, 준비하는 직원은 22게이지만 가지고 있었다. 다시 준비하는 과정을 기다리는 나는 순간순간이 두려움이었다. 마취하고 바늘로 찌르며 “여기가 맞나?”라며 확인하는 의사의 목소리가 나에겐 공포였다.      


3~4명의 직원이 호흡이 잘 맞는 듯했다. CT 통을 여러 번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그들은 검사가 잘되고 있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계속 나에게 격려해 주었다. 바늘이 처음 들어갈 때, 약간의 통증이 있었으나 괜찮았다.     

의사는 쩌릿한 통증만 말하라고 했다. 그게 착수 마비를 부르는 증상이란다. 처음 쩌릿함을 느끼는 듯했으나, 괜찮았다. 1시간 가까이 긴 검사였으나, 통증은 심하지 않았다. 단지 무섭고 겁이 날 뿐이었다.  

   

검사가 끝나고 병실로 오자 모래주머니를 4시간 똑바로 누워서 지혈해야 한다며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내일 퇴원하라고 했지만, 나는 더 이상 차디찬 본 병원 침대에 누워있고 싶지 않았다. 저녁 9시가 넘어 가퇴원 절차를 밟았다.     




딸에게 카카오 택시를 부르라고 했다. 나는 서지도 못해 딸이 가져온 휠체어에 의지한 채 택시기 있는 곳으로 갔다. 차 안에 앉아 소리 없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요양병원으로 돌아온 나는 내 방에 들어오자, 친정에 온 것처럼 마음이 편해졌다.     


검사로 인해 이틀간 씻을 수 없는 나는 “비타민 B17"부터 맞았다. 나 때문에 며칠 동안 잠을 못 잔 딸은 씻는다며 욕조에 몸을 담갔다. 각자의 시간이 흐른 뒤 12시가 되자, 딸은 어느새 잠이 들어있었다.     


나도 불을 끄고 잠을 청했지만, 참을 수 없는 통증으로 거의  밤을 지새웠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갑작스러운 통증이 3일 동안 나의 모든 멘탈을 집어삼켰다. 잠시 잠들었던 나는 눈을 뜨는 순간 행복한 하루가 아닌 두려운 하루를 맞이하게 되었다.     


                                                                                                                                   -계속-

2024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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