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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경 Nov 10. 2024

죽음 앞에서 바라보는 가족 : 남편의 무관심


사람은 각기 다른 소원을 품고 살아간다. 어떤 사람은 사랑을, 또 다른 사람은 돈을 혹은 행복을. 이처럼 제각기 추구하는 것이 다르다. 지금 나에겐 ‘목숨’이라는 단 하나의 간절한 바람만이 기다린다.     


매일 반복되는 병상에서 하루라도 통증 없이 더 머무르고 싶은 간절함이 살아가는 유일한 목적이 되었다. 결국 생명 연장이 가장 시급한 문제이다. 그렇다면 오래 사는 것만이 내가 추구해야 하는 삶일까?     




심한 통증이 덜해지자, 이젠 웬만한 아픔은 자연스러운 일상적인 삶이 되었다. 심한 고통 속에선 세상 모든 감각이 흐릿해지고, 사람의 존재까지 무뎌지지만, 그 와중에도 딸과 함께하는 순간만큼은 분명히 살아있어 행복감을 느낀다.      


금요일 수업이 없는 딸은 목요일 저녁이나 금요일 오후에 찾아와 주말을 함께 보낸다. 3일간 엄마의 몸을 구석구석 마사지해 주면서 나의 몸 전체를 살피며 삶과 웃음을 불어넣어 준다.     


이처럼 내 곁에서 나를 정성스럽게 돌봐주고, 삶의 온기를 불어넣어 주는 딸은 내게 가장 큰 기적의 선물이다. 2주간 고통의 시간을 함께 보낸 딸과 자기 위해 침대에 누워 잠시 힘들었던 순간을 이야기했다.     


“딸! 이번에 정말 이병원 원장님께 감사해! 남편이란 너의 아빠도 한번 오지도 않는데 매일 괜찮냐고 물어 봐주고, 간호사들에게도 잘해주라고 하면서 상태를 수시로 확인했다더라고.”     


“엄마! 그들은 엄마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 같았어. 엄마 몰랐어? 하하하!”     


“정말! 하하하! 나는 생각도 못 했네? 딸 말 들어보니 맞는 거 같은데! 이렇게 한번 쓰러지면 거의 일어나지 못한다고 하더라. 그래서 본 병원에선 아프다고 하니깐 머핀 사를 원하는 만큼 놔 주라고 했데.”     


“그니깐! 엄마는 통증이 사라지지 않으니 죽고 싶다고 하지! 여기선 더 이상 일어나기 힘들다고 본거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준 거지. 엄마 정말 몰랐단 말이야? 하하하!”  

   



딸의 말에 함께 크게 웃었지만, 다시 한번 나의 어리석음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만 이 고통 속에서 내가 자살을 선택하지 않는 한 죽음이 오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구나!’ 다른 사람들이 나의 고통을 바라보는 객관적인 시선은 언제든 죽음을 앞둔 말기 암 환자였다.     


얼마나 바보였단 말인가? 작년에 읽었던 “황금종이” 소설이 생각난다. 호스피스에서 죽음을 앞둔 암 환자가 여전히 평생 살 거로 생각하고 자신의 전 재산인 1억 넘는 통장을 숨기는 모습이.     


좋아하는 조카가 오자, 같이 해외여행을 가자며 통장을 보여주는 장면. 결국 그 돈은 망나니 아들이 독식하여 복권 사는데 모두 날렸다. 나 역시 통증 속에서도 마음 한구석에 돈을 걱정하는 미친 내 모습을 보는 듯했다.    

  

어제도 나는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겠다는 보험사를 찾아가 보험금을 요구했다. 이젠 “뼈 전이”라는 병명이 있는 한 돈에 대한 걱정은 사라졌다. 그러면서도 코인 주식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내 모습이 한심했다.      




이렇게 아프다고 해도 한 번도 오지 않는 남편을 생각하면 억울했다. 이제까지 내가 얼마나 허망한 것을 쫓아 왔는지 새삼스레 부끄러웠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통증을 이기려고 나의 모든 에너지를 소모하고 싶지 않다.   

  

내가 죽으면 적지 않은 돈을 남편이 가져갈 것이다. 어쩌면 그가 받을 돈이 지금껏 내게 보여주지 않았던 관심보다 클 것이다.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남편의 뒷바라지도 모자라 죽으면서까지 나의 큰 재산을 넘겨주어야 할까? 죽으면 모른다지만, 지금은 화가 난다.     


딸은 절대 죽지 말고 다 쓰고 죽으란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병원에서 밥 주고 청소해 주고 빨래해 준다. 내가 쓰는 돈은 비싼 물과 비타민 B17 사고 아이들 오면 식사 사주는 게 전부다. 이젠 이쁜 옷도 액세서리도 필요 없다.      


병원 밖 외출도 힘들다. 본 병원이나 가고 가족과 친구들이 오면 근처 음식점에 가는 게 전부이다. 이때도 가장 편한 옷과 신발을 신고 가야 한다. 참을 수 없는 극한 통증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나는 남편과 아들에서  

   

“두 부자는 내 집에서 나가! 둘이 나가 살아! 그 집 팔아서 딸 살 곳 마련해 주고 죽을 때까지 내가 남은 돈 쓸 거야. 개새끼도 자기 식구가 아프면 간호해 주고 걱정해. 너희 둘은 사람도 아니야.      


아무리 내가 키운 아들이라지만, 내가 잘못 키웠는지? 이상한 성격의 아빠를 닮았는지? 용서가 되지 않아. 나 죽으면 장례는 치르러 올래? 아니면 돈 챙기러 올래?”라며 막말을 했다.     


“무슨 소리야? 매일 딸에게 어떤지 물어보고 걱정했지! 어제도 간다니깐 오지 말라며? 그래서 안 간 거잖아?”라는 뻔뻔한 남편의 답변에 나는 더욱 울화가 치밀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죽겠다고 한지가 일주일이 넘었다. 그날 와서 상태는 보고 갔어야지. 아무리 일해도 매일 저녁에 얼굴은 비춰야지. 당신이 할 일을 딸이 하는데 그러면 딸에게도 먹을 거 챙겨주고, 위로라도 해주고 가야지.”     


“미안해! 갔어야 했는데.”     


“내 집에서 둘 다 나가! 그리고 제발 이혼해 줘! 없으면 기대도 안 하고 그러려니 하잖아! 법적으로 나를 묶어놓고 사람의 피를 말리는 거야. 내가 유방암에 걸린 것도 이 지경까지 온 것도 다 당신 때문이잖아. 이젠 그만 좀 하자.”라고 말하자, 남편은 어떠한 대답도 연락도 없다. 더 화가나 막말을 톡에 올려자, 이젠 읽지도 않는다.     




그래도 아들은 톡을 보자마자, 자기 수준에 맞는 초콜릿과 사탕들을 사 들고 병원으로 달려왔다. 아들에겐 가족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간식을 먹고 돌아가는 아들의 뒷모습이 나의 마음을 짠하게 했다.     


“엄마! 엄마 아들이 바뀔까?”라는 딸의 말에     


“아니! 하지만, 아들은 가르쳐야지. 아빠는 어쩔 수 없지만, 아들은 아빠처럼 살면 안 되지. 엄마 죽고 나면 아들도 새 가정을 가질 텐데 너희 아빠처럼 살면 평생 외롭게 살아야 해. 지금 이쁘니와 엄마가 잘 가르쳐야지.”

    

“엄마! 기대하지 마! 아빠는 회피형이야. 지금도 엄마 어떤진 자주 물어봐.”     


아들은 예전과 다르게 가끔 전화도 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오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유전적인 이기주의가 쉽게 좁혀지진 않았다. 그런 모습이 죽음을 앞둔 나에게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죽음을 앞둔 나는 묵묵히 내 곁을 지켜주는 딸에게 감사하고 위안을 받는다. 만약 딸이라도 없었다면, 나는 더 깊은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렸을 것이다. 죽음을 앞둔 병상의 하루하루는 나에게 기회이자 깨달음을 준다.  

    

정말 가족이란 무엇일까? 내가 그토록 원하는 가족은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며 아끼는 거였다. 비록 세상이 우리를 외면할지라도 가족 안에서는 모든 걸 행복으로 전환 시킬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내 삶의 끝자락에서 그 믿음이 그저 나만의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곁에서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손을 잡아주는 딸 덕에 오늘도 버티며, 감사하는 하루를 살아가고 있지만, 내가 정말 아플 때, 혼자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건 아닌지. 불안한 마음을 버릴 수 없는 나 자신을 보며 순간 슬픔에 잠긴다.      

2024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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