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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경 Sep 13. 2024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바라본 가족 : 남편과의 거리


각 개인에게 있어 가족이란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그 속에서 태어나 자라고 많은 것을 배우며 성숙해 간다. 가족은 세상 어느 곳보다 따뜻하고 안전해야 하며, 서로를 진정으로 아끼며 사랑해 주는 곳이어야 한다.     


부모는 가족 안에서 자녀를 사랑과 책임으로 키우고, 자녀는 그런 사랑을 받으며 성장한다. 하지만, 현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항상 이상적이지 않다.  

   



나 또한 내 가정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남들이 뭐라고 해도 나로서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며 지켜온 가정이다. 이 안에서 내가 책임져야 하는 가족은 누구일까? 물론 내 소중한 아들딸이겠지? 그렇다면 나를 책임져 줄 가족은 누구일까?      


죽음을 바라보는 “유방암 뼈 전이”라는 진단을 받은 후, 더 많은 걸 고민하게 되었다. 죽음이란 단어가 눈앞에 선명히 자리 잡으니, 아이들과 남편에 관한 생각, 내가 살아온 과거와 현재, 나의 주위 사람들 등 남은 시간에 대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채워 나를 잠 못 들게 할 때가 많았다.     


‘내가 죽으면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물론 잘 살 거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결국 죽은 나만 불쌍하겠지!      


그래도 엄마이면서 우리집 경제를 이끌어 간 나는 아이들 걱정이 앞섰다. 아이들이 컸어도 엄마 없는 세상은 그리 녹녹지 않다. 힘들어도 의지할 곳 없는 그들의 모습이 자꾸 머릿속을 맴돈다. 게다가 내가 떠나면 내 소중이들이 지금처럼 경제적 안정 속에서 살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깊어졌다.

    

내가 남겨놓은 돈으로 한동안은 무리 없겠지만, 남편이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가장 중요한 건 내 마음이 남편에겐 주고 싶지 않았다. 남편이 온전히 아이들만을 위해 사용할 거라는 기대가 없기 때문이다.      


살면서 남편의 선택은 대부분 틀렸다. 안정보다는 주식, 코인 등 한탕주의에 빠진 그의 태도는 언제나 나를 불안하게 했다. 내가 떠난 후 그가 아이들을 위해 나의 목숨 같은 돈을 현명하게 사용할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내가 쓰고 남은 돈이 얼마가 될지는 몰라도 유산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었다. 오직 내 소중이들에게만 나눠주려고 한다. 특히 딸에게 아들보다 좀 더 주고 싶다. 남편은 내가 들어놓은 보험만 잘 이용해도 사는 데 모자람이 없다.     


어린 딸은 내가 가장 힘들 때, 내 곁을 지켜주었고, 내가 아파하면 같이 슬퍼해 주었다. 나는 그 마음을 그녀에게 돌려주고 싶다. 세상에 남길 마지막 선물이기에, 공정함과 진정한 마음을 동시에 담으려는 나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결국 내 자산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금은 딸에게 55% 아들에게 45%를 주고, 나머지 현금형 금융자산이나 집은 아들딸에게 반반 주기로 결심했다. 이 모든 걸 내가 살아있을 때 어떻게 할지 결정해야만 했다.  

    



6월의 사형선고 이후 나는 조금씩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때 주거래은행에서 VIP회원을 위한 서비스라며 유산 관련 세무사와 신탁 관련 사항에 대해 무료 상담을 잡아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 약속을 지키고 내가 먹는 비싼 물을 받으러 가기 위해 하루지만 퇴원했다. 오후에 세무사와 신탁 관련 상담을 딸과 받으면서 남편에게 죄책감이 스쳤다.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았고, 나를 이 지경까지 만들었어도, 20년 이상을 함께한 사람인데, 그에겐 오직 내가 가입한 보험만 준다는 게 옳은 일일까?      


그러나 이런 마음도 잠시, 큰언니 가족과 저녁 식사 후, 집으로 돌아와 남편과 마주하는 순간, 그의 무심한 태도에 나의 모든 죄의식은 사라졌다. 남편에 대한 일말의 기대가 깨지고 큰소리가 났다.     




집에 도착하자, 딸은 입이 댓 발 나와 있었다. 그녀가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쓰레기 봉투를 열자, 날 파리 몇십 마리가 딸의 팔에 다닥다닥 붙었단다.


놀란 딸은 날 파리를 치우려고 하자, 쓰레기봉투 안과 벼란다 여기저기 구더기와 날 파리가 집을 지어 엄청난 양이 돌아다니고 있었단다.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남편이 과일 껍질을 일반쓰레기 봉투에 버린 것이다. 해마다 내가 치루는 일이었다.      


그게 싫어서 미생물 음식물 쓰레기 통을 몇 년 전 사다 놓았지만, 무분별하게 버리는 남편 덕에 기계 작동이 수시로 멈추었다. 아무리 말해도 듣고 싶은 말만 듣는 남편에겐 소용이 없었다.     


내 몸이 멀쩡할 때야 짜증을 내면서도 내가 치웠지만, 지금은 내 몸 하나 의자에 앉는 것도 힘든 나는 딸에게 말로만 치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치워도 치워도 나오는 벌레에 딸은 급기야 아빠에게 톡을 보냈다.   

 

“아빠! 날 파리와 구더기에게 집값 받아와! 아빠가 집을 만들어 주었으니 받아 와야지!”라며 재치 있게 돌려썼다. 남편은     


“곧 집에 도착해! 가서 내가 할게! 놔둬”라며 답이 왔다. 집에 돌아온 남편은 나를 보자마자,      


“엄마가 집에 있는데 엄마가 치우면 되지.”라며 딸에게 그런 일을 시켰다는 듯이 나를 원망하며 벼란다 쪽으로 향했다.      


나는 내 안에 참고 있던 화가 터져 나왔다.     


“뭐라고? 지금 나 보러 쪼그리고 그걸 치우라고? 당신 정말 남편 맞아?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아도 의무적으로 산다고 해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어봐라? 남도 그렇게는 말하지 않겠다. 당신이 아무리 내가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라며 소리를 질렀다.      


“딸이 벌레를 무서워하니깐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인데 뭐 그리 화를 내?”라며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짜증을 냈다.     


기가 막힌 나는 “당신은 내 상태를 생각은 하고 사냐? 내가 죽어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겠지만, 할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어.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서류상 남편이면 최소한 양심이라도 있어봐라. 오랜만에 봤으면 ‘왔네? 몸은 좀 괜찮아졌어?’라고 물어보는 게 기본 아니야?”라며 지랄하자,      


남편이 뭐라 또 말하려고 하자, 딸은 얼른


“미안해!”라고 말하면서 “아빠 따라 해 봐! 미안해! 다음부턴 조심할게! 따라 해 아빠!”라고 말하는 딸의 재치에 나는 그만 웃고 말았다.      


남편은 미안하다고는 했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나오질 않았다. ‘그 버릇 남 주겠냐?’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화가 났다.     


아빠의 어이없는 행동에 딸은 웃으면서 “절대 결혼하지 말아야지! 엄마가 아빠를 골랐잖아! 그러니깐 참아!”라고 흥분한 나를 보며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옆에 있는 딸은 재치로 나를 달래고 있었지만, 나는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남편의 무책임함과 무관심은 나를 더 깊은 실망 속으로 몰아넣었다. 결국, 나는 남편에 대한 혹사나 하는 기대조차도 버리기로 했다. 그에게 더는 아무것도 바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항상 미워하지 않으려고 나를 다스렸다. “내 남편인데! 마지막까지 그래도 내 곁에 있어 줄 사람인데!”라는 마음에 이해하고 사랑하며 마지막을 마무리하며 살려고 노력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망상이었는가?’   

   

아이들 앞에서도 최대한 아빠의 좋은 면만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이럴 때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남편에 대한 불만을 아이들 앞에서 하게 된다. 엄마의 불평이 자녀들에게 얼마나 안 좋은 영향을 주는지 알면서도 내 성질을 자제하지 못하는 내가 한심할 때가 많았다.      


오늘도 남편은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던진 말이라는 거 안다. ‘알면서도 나는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아직도 남편에게 무엇을 기대하는 걸까?’    

  



나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존재는 내 귀한 아들딸이다. 그들이 앞으로 잘 살아가도록 나의 모든 남은 에너지를 쏟고 싶다. 내가 떠난 후에도 그들이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그 준비 과정에서 남편과의 관계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됐다.     


내가 만든 가정은 사랑으로 시작되었고, 그 안에서 나의 아이들이 자랐다. 하지만 이제는 그 사랑이 과연 나와 이 가정을 지키는 최선의 선택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아이들을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앞으로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은 나의 마지막 남은 존엄과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다. 남편에 대한 기대는 내려놓았고, 나를 위해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 현명한 결정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 지켜온 가정이지만, 가끔은 그 가정의 형태가 변하는 것이 더 나은 방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마지막까지 내 가정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그리고 남은 시간 동안 아이들에게 무엇을 남길지 고민한다. 사랑은 때로는 양보하고 포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     

2024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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