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흐름대로 배설하는 연애 일기
샌드위치를 버릴 수 없어 아이패드에 눈을 고정시킨 채 우걱우걱 씹어 삼켰다. 비긴 어게인에서 김윤아가 검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소향의 사랑 넘치는' I’ll always love you'가 다음으로 이어졌다. 체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맛없는 샌드위치를 전부 목으로 넘겼다. 무작정 보라색 비니와 색동저고리 같은 워머를 챙겨서 발끝까지 오는 검정 플리스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고 빌라에서 나와 길을 나섰다.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 나랑 비슷하게 주황색 비니, 파란색 넥 워머, 경량 패딩을 입고 커다란 태극기를 휘두르는 50대 남성이 있었다. 무엇을 향한 맹목적인 의지가 그를 미친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그는 한 겨울 추위를 뚫고 이곳에 있을 수밖에 없는 그만의 사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를 그저 이상한 사람으로 치부해버린다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는데 안타까움이 드는 것도 막을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정말 다양한 것에 마음을 쏟으며 살아간다.
내 안에 이렇게나 많은 쓸쓸함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괜찮다가도 문득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다. 가슴이 살짝 조여 오고 콧등이 싸해지고 눈가가 촉촉해진다. 울렁인다. 아직 눈물이 되지 못한 무언의 압력이 목 아래서 울컥울컥 파도를 친다. 토할 것만 같다. 사랑이 실패했다. 그 사람과의 관계가 완전히 정리된 것은 아니지만, 내가 현실에서 마주하고 싶었던 내 상상 속의 그림과는 이제 이별이다. 그건 정말 내 의지로 그린 것은 아니었다. 나의 패턴은 이런 식이다. 상상 속의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 상상 속의 그를 어여삐 여긴다. 볼도 만지고 뽀뽀도 하고 사랑스러운 강아지를 물고 빨 듯이 그를 다룬다. 실제로 현실이 될 수 있었을까? 아니다. 혹 나중에 비슷한 상황이 눈앞에서 펼쳐진다고 해도 상상 속의 바로 느낌과는 영 다를 것이다.
그와 함께 있었던 시간이 솔직히 재밌지는 않았다. 나 스스로 재밌다고 설득하려 했던 이유는 그와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애썼던 이유는 그가 아직 나에게 보여주지 않은 모습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같이 있을 때 편안하지 않았다. 불편함을 외면하며 편안함을 가장했다. 그의 집에서 영화를 보다가 트림이 나와버리기도 했다. 아아아아. 너무 민망해서 아무 말 못 했다. 친구도 아니고 썸녀도 아니고 도대체 내가 그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 수가 없어서 갈팡질팡 했던 것 같다. 예상치 못한 작은 사고는 그런 불편한 상황에서 터지기 마련이다.
전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정말.. 절망했던 것 같다. 눈빛이 퀭한 사람. 초라하고 불행해 보였다. 최선을 다해 꾸민 공간에서도 안정을 취하지 못했다. 예술 안에서 내가 풀어놓을 것들을 전혀 풀어놓지도 못했다. 그런 실력이나 있는지 끊임없이 의심하며 지긋지긋한 시간을 보내왔다. 그렇기 때문에 활발하게 자기 것을 어떻게든 풀어놓는 주위 동료들에게 매력을 느꼈다. 그 옆에서 나 자신을 가치 있다 스스로 말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에게 흥미가 없는 사람에게 사랑을 갈구하게 된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잘 자리 잡고 있었다면 그를 만나고 싶었을까. 여전히 그가 멋지고 그의 방식이 내 것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그를 통해 내가 예술 작업에 대한 갈망 그리고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는 동료들을 가까이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안정감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곁에 있으면 그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내 안의 굶주린 것이 속삭였다는 것을 모른 체할 수 없다.
사랑은 내가 내 안을 들여다볼 때에 비로소 알아야만 하는 것들을 하나씩 토해낸다. 형체 없이 덩어리 진것들을 쪼개고 확대하고 나면 내가 알아야만하는 진실이 하나 둘 수면 위로 올라온다. 그간 인식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보게되고 삶을 해석하는 또 다른 관점을 내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 시간들로 인해 한 사람을 그렇게 까지 포용하고자 하는 내 안의 커다란 사랑을 보았고,
세상 멜로디들이 밤낮없이 가슴에서 춤을 추는 늘 남의 이야기였던 경험을 했고
버림받은 아픔과 외면받은 마음과 쓸쓸함과 괴로움을 느꼈다. 창피함도 함께.
뜬금없지만 대학생 때 한 선배를 짝사랑하며 느꼈던 당혹스러움도 문득 올라온다.
조금 쌀쌀하지만 평화로운 고궁을 걷다가 한참을 앉아있었다.
적당히 시원한 바람과 파란 하늘과 산책하는 사람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배경으로 시원하게 뻗어있는 나뭇가지들. 따뜻한 햇빛.
속눈썹에 맺힌 이슬이 빛을 받아 무지개 스펙트럼을 만들었다.
아직은 쓰리지만 매일의 평화에 감사하며 나는 나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그 위에서 또 새로운 사건과 인연들을 만날 것이고 다시 울고 웃고 설레면서 무한히 길을 잃고 찾음을 반복할 것이다. 그럼에도 어느 명언처럼 평생을 방황하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