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87>
감독 : 장준환
개봉일 : 2017.12.27
장르 : 드라마
출연 : 김윤석, 하정우, 김태리 등
해당 작품은 앞선 두 작품 <부조리한 사회, 패배한 청춘 '병구'>, <가능성을 연 청춘 '화이'>와 같은 세계관을 이어나가는 작품입니다
위대한 사람들과 평범한 사람들
이 세상에 위대한 사람은 없다
단지 평범한 사람들이 일어나 맞서는 위대한 도전이 있을 뿐이다
- 윌리엄 프레데릭 홀시 -
21세기, 202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위대한 사람이라고 칭하는 이들을 쉽게 접한다. 연 매출 100억 대 CEO, 빌보드 차트를 점령한 아이돌, 올림픽 금메달을 거둔 운동선수, 노벨상을 받은 작가, 유명 브랜드의 런웨이를 걷게 된 모델 등 우리가 접하는 이들의 특징은 남들과 다른 비범한 인물들로 부러움을 산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이들의 시작은 평범한 사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남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고, 친구들을 사귀고, 공부해왔던 이들은 학창 시절 내 옆자리 짝꿍처럼 같은 학생이자 친구였던 이들이었다. 즉, 그들 역시 태어났을 때부터 비범한 인물이라고 낙인찍힌 건 아니다.
그렇다면 위대한 사람들은 우리가 아는 유명하고 부유한 인물들만을 칭할까. 여기서 우리는 '위대한'이라는 표현에 다른 시각을 가져야 한다. 위대한 사람들이 제일 낮은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 가장 최고 높은 곳을 찍을 수 있었던 건 특별한 도전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두려움, 불안, 우울함 등 여러 부정적인 감정이 가득하고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그들은 이뤄내겠다는 마음가짐을 굳게 먹었고 끝내 그 다짐을 이뤄냈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그들의 결과물만을 보고 착각한다. 위대한 사람은 특별하고 별나 위대한 결과를 보여줬기에 위대한 '인물'이라 착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위대한 인물로 보이는 건 '위대한' 행동에 있었기에 특별한 결과가 탄생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위대한 사람은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신처럼 독특한 게 아닌 행동으로서 비범한 모습을 띤다. 위대한 행동만이 남을 뿐 모든 이들은 그저 평범한 이들에서 비롯되었다. 윌리엄 프레데릭 홀시의 말처럼 말이다.
연희는 누구인가
영화 <1987>의 연희(김태리)는 '우리'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영화는 비극으로 남았던 '박종철 고문치사', '이한열 열사 사건'의 주요 관계 외의 허구 인물 연희를 등장시키면서 그 시절 운동에 참여하지 않거나 외면했던 이들을 표현했다. 민주화를 일으키고자 했던 운동권의 인물들이 있었던 반면 그 운동을 방관하거나 개입하고 싶지 않았던 이들도 존재했었다. 그래서 영화는 민주화 운동 이외의 인물들을 '연희'라는 캐릭터에 대입해 평범한 우리를 표현했다.
영화는 1987년 6월 항쟁 이전의 이야기를 다룬다. 당시 전두환 정권으로 인해 잃어버린 민주주의를 되찾고자 했던 청춘들의 아픔과 억울하게 죽은 박종철 사건을 중심으로 서사한다. 영화 속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실존 인물이지만 그중에도 유일하게 상상 속 인물인 연희는 관객들을 사로잡는 데 충분했다.
연희가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건 그녀의 변화된 태도였다. 영화 초반, 연희는 민주화 운동을 외면하고 부정했던 인물이었다. 그녀가 이럴 수밖에 없었던 건 당시 파업 노동자였던 연희 아버지가 동료들에게 배신당해 화병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연희는 불합리했던 이 세상을 누구보다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때 받은 상처와 아픔 때문에 현실을 외면하고 숨었다. 이런 그녀의 아픈 심리는 병용 삼촌(유해진)과의 갈등에서 두드러지고 왜 그녀가 사회에 맞서고자 하지 않는지 구체적으로 서사된다. 병용이 잡지를 이용해 김정남(설경구)에게 밀지를 전달하는 모습은 마치 예전 아버지가 노동운동을 했던 때와 겹쳤고, 이는 그녀의 기억을 되살려 결국 삼촌의 행동이 트라우마로 남게 된 것이다. 그래서 연희는 자신을 다치게 하면서까지 사회에 저항하는 운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개혁 운동의 탄생과 혁명을 꿈꾸는 운동권은 그녀에겐 잔인했고 원망스럽기만 했다. 1)그래서 그녀는 앞선 두 작품의 두 인물인 병구, 화이와는 다르게 더욱 숨고자 했고 시대를 변화시키려는 운동권을 철저히 외면했다. 이 감정은 슈퍼마켓 앞에서 이야기를 나눈 이한열(강동원)과의 대화에서 절정에 치닫는다.
연희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야만 했던 대모 운동에 부정적이다. 바꾸려고 노력했지만 많은 희생자를 낳았고, 청춘은 끝내 무참하게 짓밟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영동으로 끌려가 고문당하는 삼촌과 경찰들의 강압적인 폭력을 당해야만 했던 엄마를 보며 연희는 현 사회의 실태를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을 잃지 않기 위해 삼촌이 남긴 밀지를 김정남에게 보내면서 스스로 소극적인 인물에서 탈출한다. 이런 그녀의 도전적인 행동은 변화를 꿈꾸는 주체적인 청년이 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자 사회를 향한 그녀의 첫 도발이었다. 하지만 얼마 안가 '이한열 열사 사건'이 발발하면서 사회는 다시 한번 더 청춘들을 향해 도전장을 선포한다. 이는 저항하려는 청춘들을 향한 경고 메시지이자, 청춘들을 넘어 전 세대를 아우르는 시초가 되어 앞선 두 인물인 병구와 화이 속의 세상과는 다른 모습을 띤다. 결국, 연희의 세상은 독재 정권으로 물들였던 부조리한 시스템이 청춘들과 여러 세대가 하나 되면서 무너졌음을 보여준다. 마침내 사회는 졌고 청춘들이 승리한 것이다.
붕괴한 세상을 맞이하다
연희는 장준환 감독의 전작 화이, 병구와는 달리 저항에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소중한 이들의 고통과 죽음을 직접 보고 느끼면서 스스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김정남에게 밀지를 전달하면서 악순환이었던 사회는 하나둘씩 고리를 풀어나가기 시작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은폐하려던 이들을 체포하면서 끊어진다. 하지만 '이한열 사건'이 모든 이들의 분노를 앗아가 광장으로 모두를 불러 모으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광장 속 경찰들의 도구를 부수고 시민들이 외치는 함성은 세상이 붕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제 병구와 화이가 원했던 세상은 연희의 세상에서 이뤄진 것이다.
누구보다 용기 있는 도전이었다. 간접적이고 아주 작은 움직임에 불과했지만, 그 움직임 하나가 전 세대를 불러 모으는 시작점이었고 이는 나아가 세상이 변화할 가능성을 보였다. 그렇게 연희는 우리 시대의 대변인이자 얼굴이었으며 다른 주인공들도 아닌 시대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장준환 감독의 영화는 이런 현실 속 불안한 청춘들을 그려내고 있다. 그가 탄생시킨 세 인물은 현실 속 불안하고 힘겹게 버티는 청춘들을 대변한다. <지구를 지켜라>의 병구, <화이:괴물을 삼킨 아이>의 화이는 악을 무너뜨리지 못했거나 무너뜨렸다 해도 이변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작품 속 인물들의 도전이 있었기에 연희의 세상에선 마침내 악을 없애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들의 모습을 통해 장준환 감독은 세상의 청춘들이 안타까웠으며 그들을 이렇게 만든 부조리한 사회와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영화를 통해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가 부서지는 찰나를 영화에 그려냄으로써 청춘들을 위로했다. 패배한 병구, 가능성을 연 화이, 붕괴한 사회를 보여준 연희를 통해 말이다. 비록 더 나은 현실로 변하진 않았지만, 청춘들이 있었기에 사회는 점점 달라진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래서 감독은 자신의 마지막 영화 <1987>을 통해 청춘의 종착점은 붕괴한 사회가 곧 그들을 위한 나라임을 말한다.
1) 연희는 첫 소개팅을 나가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시위에 휘말리게 된다. 거기다 삼촌의 밀지 심부름을 외면하고, 만화 동아리에서 상영한 광주 민주화운동 영상을 보면서도 이 현실의 저항을 원치 않는다.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그녀의 모습은 당시 운동권 외 평범한 청년들의 모습을 대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