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50편을 쓴다는 것

by 긴오이

시를 쓴다는 것은 마치 드립(drip) 커피를 내리는 것과 같다. 생각의 알갱이들을 잘게 갈아 거름종이 위에 쏟아놓고 천천히 물을 내리는 퇴고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글 향기가 물씬 풍기는 시(詩)한 편이 가득, 한잔 담긴다. 나는 천천히 나의 시를 음미한다. 초안을 만들어 놓고, 퇴고의 과정을 거치며, 그리고 마침내 시 한 편을 완성하기까지 나는 내가 쓰는 습작을 수십 번 읽게 된다. 분량이 짧아서이기도 하지만 단어 하나, 조사하나 바뀔 때마다 그 맛이 달라져서 시의 퇴고 과정이 산문의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반복 과정을 거친다고 느끼게 된다.


시 한 편이 완성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늘 제각각이다. 어떤 시는 금방 완성되기도 하지만, 또 어떤 시는 며칠을 고민해도 한 줄을 옮기기 힘든 때가 있다. 그래서 시 한 두 편을 가지고 쓰기가 쉽다, 어렵다 판단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시집 한 권을 완성하기 위해 일정 분량의 시를 쌓아놓는 것은 확실히, 그리고 매우 힘들다는 점이다. 시집 한 권은 보통 50 ~ 60편의 시들로 이루어지는데, 시 50편을 쓴다는 것은 생각보다 매우 힘든 작업임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참고로 나의 경우엔 그야말로 저 옛날의 습작까지 박박 긁어모아 겨우 48편을 완성했다) 보통 시집은 1부, 2부 ~ 5부 정도의 분량으로 한 권을 엮게 되는데, 브런치에는 50여 편의 글을 모두 한 권으로 엮는 경우는 없는 것 같아서, 나는 그동안의 시를 모아 총 두 권의 브런치 북으로 엮어가고 있는 중이다. (잠시 홍보하자면 「시와 함께 스콰트」, 「시를 풀업 Pull Up」이다^^)


시집을 웨이트와 연관지은 것은 시를 쓴다는 것이 일정 부분 자신을 단련하는 것과 같은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싸이 「강남스타일」의 가사처럼 사상을 울퉁불퉁하게 만들고 싶은 사람은 시를 써도 좋다. 아마 펌핑감이 꽤나 만족스러울 것이다.



시 50편을 쓴다는 것은 일종의 자기 발전의 확인이자 성취의 증거이다.


기왕 웨이트 이야기가 나왔으니 웨이트와 연관 지어 이야기해보겠다. 시를 써놓고 보면 그것은 마치 훈련일지를 보는 것과 같다. 자기 성장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것은 추상적인 상념과 달리 기준이 되는 어느 중량(Kg)으로부터 오늘 나의 컨디션이 후퇴했는지, 그대로인지, 아니면 조금이나마 뛰어넘었는지에 대한 명쾌한 답을 준다. 본질적으로는 과거와 현재에 대한 성찰을 통해 지금 가고 있는 항로가 어떠한지 점검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웨이트 훈련을 하는 사람은 알 수 있다. 당신이 성장한다는 것, 그리고 그 성장에 대해 스스로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삶의 활력이며, 보람인지... 시(詩)는 그것을 정서적 영역에서 작동시킨다. 당신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아직 우상향의 그래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쾌감과 성취감을 준다. 그리고 그 활력과 보람, 성취감들은 당신이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시간이 두렵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무엇보다 시의 연대기를 중요시한다. 시집 1편과 2편의 목차 순서도 시의 퀄리티를 상관없이 무조건 작문의 시간 순서대로 구성했다. 오랜 시가 제일 뒤편에 배치되고, 첫 장의 첫 편엔 가장 최근의 시가 올라왔다. 나는 이 시간 순서를 계속해서 고집할 생각이다. 시의 목차를 훑어보면, 마치 스카이뷰의 위성사진처럼 자기 세계관이 내려다 보인다. 산과 강과 논밭들, 그리고 구불구불한 길들처럼 나의 생각과 관심사, 고민들, 희망들, 우수와 슬픔들이 빼곡히 펼쳐져 있다. 오롯이 나의 세계이고 나의 삶이다.


나는 그 세상에서 나의 가족들을 본다.


이상하리만치 시의 대부분이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일관되어 있다. 아버지와 아내와 딸애, 그리고 나에 대한 소소하고 일상적인 소재들이 대부분이다. (그러고 보니 아직 엄마에 대한 글이 없다^^) 나는 내 시를 통해 내가 가족에 대해 꽤나 세심한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은 각각의 대상에 대한 애정과 시선이 어떠한 미묘한 차이를 지니는지, 그리고 그것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로 인해 나는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나는 나에 대해 좀 더 깊은 부분을 알아가는 중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들이 실은 나를 좀 더 풍부하게 만들어 가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이 일련의 과정들이 주는 만족감과 성취감은 이상하리만치 나를 안심시키고 있으며, 이런 것도 결국 시를 쓰지 않았더라면 스스로 자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점도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당신이 당신의 삶을 좀 더 아름답고 풍부하게 가꾸고자 한다면 글이든 그림이든 자기 성찰의 기록을 시작할 것이며, 또 그것은 단편과 단편이 아니라 일정 분량 함께 모아졌을 때, 비로소 그 내밀한 세계의 자아를 당신을 향해 활짝 열기 시작할 것이라는 점을 말해주고 싶다.


어쩌면 자기 기록의 특성상 저 윤동주 시인이 「자화상」이란 시를 탄생시킨 것은 필연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자화상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이, 그리고 자아가 완벽할 순 없다. 어쩌면 그것은 미워 보일 수 있고, 그래서 모른척하고 싶고, 그러나 모르척 하기엔 그 세계가 너무 측은해서 다시 돌아보게 되고, 또 미워져, 싫어져 돌아설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모두가 그냥 그대로의 나란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이것은 내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생긴 타협인지, 일종의 합의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냥 모든 타입의 내가 그냥 나인 것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자신을 객관화하여 그(나)를 지켜보면 고민하고 번뇌하는 자신도 때론 그냥 귀여워 보일 때가 있다. 언젠가 삶에 더 이상 이불킥하지 않기로 했다란 문구를 썼던 것 같은데 정말 그러기로 했다.


시를 쓴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우리의 지혜와 통찰이 부족하여 당장 내일의 삶을 알 순 없다 하여도 우리는 좁은 공간 속에서는 곁의 기척을 느낄 수 있듯이, 우리의 삶에 온전히 집중하면 우리 곁을 지나치는 미세한 감정의 흐름과 떨림들, 그리고 그 향기들까지 모두 감지할 수 있게 된다.



시 50편을 쓴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을 익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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