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향한 '탈주'

소설 <달과 6펜스>, 그리고 영화 <탈주>

by 봉칠이의 잡생각

데카르트가 말하기를 인간은 ‘생각해야 존재한다.’ 이는 그 자체로 “유토피아”가 인간의 정신 외부에서는 존재할 수 없음과 연결된다. 데카르트가 이야기하는 ‘생각’은 끊임없는 자신과의 마주에서 비롯되는데, 이는 큰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인간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고통’이 수반되는 반면, “유토피아”는 그 자체로 고통이 없는 세상이기에 유토피아에서는 인간이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는 마치 소설 <달과 6펜스> 속 ‘달’과 ‘6펜스’의 대립처럼 ‘이상적 유토피아’와 ‘현실에 대한 안주’ 사이를 대립적으로 형상화하기도 한다. 인간으로 하여금 정신 속에만 존재할 수 있는 ‘이상적 유토피아’와 ‘현실에 대한 안주’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도록 하는 것이다.


유토피아를 향해서

영화 <탈주>의 포스터. 차례로 왼 규남 오 현상

영화 <탈주> 속의 규남과 현상의 대립이 묘사하는 구도 또한 이와 유사하다. 북한이라는 현실 체제에서 벗어나 ‘선택의 자유’라는 이상적 유토피아를 현실화하고자 남한을 향해 탈주하는 ‘규남’. 그런 그를 쫓는 체제의 굴복자 ‘현상’은 그 자체로 달을 쫓는 자와 6펜스를 쫓는 자의 대립적인 모습을 투영한다. 마치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가 예술적 이상을 향해 기행을 저지르듯 규남은 그 누구보다 처절하게 달을 쫓는 반면, 북한 체제의 한가운데에 앉아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연주하는 현상은 달을 버리고 6펜스를 향해 손을 내밀 뿐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규남을 바라보는 현상의 시선이다. 6펜스를 쫓는 현상에게 있어 규남이 쫓는 ‘달’은 자신이 버린 무언가이다. 실제로 어린 시절 스스로를 ‘피아노형’이라 지칭했던 그는 ‘예술’, 그중에서도 음악을 쫓았다는 점에서 그 누구보다 ‘달’을 열망했던 이다. 하지만 그가 군인이 되어 오로지 ‘6펜스’만을 쫓을 때에 ‘달’은 그저 머리 위에서 빛날 뿐 결코 그의 시선 끝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현상 앞에 나타난 오직 ‘달만을 쫓는’ 규남은 그 자체로 ‘열등감’이자 열망의 대상이다. 현상이 ‘체제’라는 외부의 압력을 핑계로 결코 선택하지 못했던 길을 목숨을 걸고서 쫓는 규남의 모습은 현상의 ‘굴복’이라는 열등감을 쿡쿡 찔러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왜 저렇게까지 하나’싶을 정도로 규남을 끝까지 쫓는 현상의 모습은 사실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정당화하기 위한 일종의 도피라 해석할 수 있다.




우리의 선택은

남한에 도착했음에도 여전히 자신의 ‘유토피아’를 쫓는 규남의 마지막 모습. 규남이 남긴, 아니 사실 피아노형이었던 현상이 남긴 책, <아문센>을 바라보는 현상의 모습은 우리에게 당신은 무엇을 쫓을지 질문한다.

옳은 길이란 정해져 있지 않다. 비록 영화 <탈주>는 남한을 향해 달리는 규남의 끝을 성공적으로 묘사하기는 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달을 향한 여정은 사실 그리 간단하지 않다. 특히나 자신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완전한 '유토피아'를 쫓는 일은 수많은 정신적 고통을 초래한다. 그렇기에 이 앞에서 어느 쪽을 향해 손을 뻗을지는 오로지 당신에게 달렸다. 과연 당신은 달을 향할 것인가, 6펜스를 향할 것인가?



같이 보면 좋을 작품


[ 영화 <블랙스완> ]

나탈리 포트만을 아카데이 여우주연상으로 이끌었던 해당 작품은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예술적 이상을 향한 예술가의 광기를 보여준다. '달'을 향해 달리는 이의 끝판왕인 셈이다.

휘몰아치는 마지막 10분을 정리하는 나탈리 포트만의 "나는 완벽했어"라는 대사는 과연 '달'이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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