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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칠이의 잡생각 May 09. 2024

나의 예술관 <1. 느낌>

1. 아인슈타인

 아인슈타인은 수학에 능숙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물리학적 해답’만이 떠올랐을 뿐, 타인들을 위한 ‘과정의 표기’, 즉 논문 작성은 수학에 능숙한 아내의 도움을 받아야만 겨우 정리할 수 있을 정도였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수학’은 ‘언어’다. 다시 말해 머릿속에 떠오른 어떠한 '원리'를 2차적으로 번역한 추상적인 매개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많은 천재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인슈타인 또한 사회적 언어보단 그 이전의 본질적인 원리를 이해하는데에 능숙했던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도 마찬가지다.

언어는 상당히 추상적이다. 김영하 작가가 언젠가 프로그램에 나와 언급한 내용이 있다.     ​  


“‘짜증난다’라는 표현은 정확한 감정의 표현이 아니다.”

 ‘짜증난다’라는 표현 아래에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속상함, 우울함, 열등감, 부러움 등등의 복합적인 감정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짜증난다’가 포함하는 ‘속상함’, ‘우울감’, ‘열등감’, ‘부러움’이라는 표현들은 어떠한가? 그것들 또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복합적 서사와 환경, 감각, 그리고 감정을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다시 말하지만 언어는 상당히 추상적이다. 사회 속에서 우리는 원활한 대화를 위해, 생존을 위해 추상적으로 표면화된 언어로 대화할 뿐이다. 우리가 감각하는 복잡하고 고유한 '느낌'은 결코 '언어화'되지 못한다.

2. 본질의 음악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본질’을 어디서 마주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반드시 그에 대한 해답이 ‘음악’에 있으리라 장담한다.

음악은 대체로 무언가를 본 뜨지 않는다. 과거 서양에서 신앙심을 전달하기 위해 작곡되었던 수많은 기악곡들은 현실에 실재하는 무언가를 따라 만든 것이 아니었다. 외부에 존재하는 어떠한 오브제가 아닌 그들(작곡가들) 내부에 존재하는 ‘신앙심’이라는 감각이자 감정이야말로 음악의 원형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과거의 음악은 ‘강요’나 ‘질문’을 하지 않는다. 듣는 이에게 마침표도 물음표도 아닌 그저 볼펜을 한 자루 쥐어줄 뿐이다. 음악을 감상한 관객은 ‘무언가를 깨닫고’ 연주회장을 나서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느낀’채 일상으로 돌아간다.

 

 니체의 주장대로 음악은 무개념적 예술이다. 그렇기에 언어로 음악을 표현한다거나 음악을 통해 개념적 언어를 드러내고자하는 일은 결코 음악의 본질에 맞지 않는다. 그저 ‘음악’을 ‘수학’과 같은 용도로 사용하는 것에 그칠 뿐이다.

 그래서 나는 기악 음악을 특히 사랑한다. 누군가의 토스를 받아 마구 자신의 이야기를 내어놓는 재즈 솔로를 사랑하고, 1악장 끝에서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모두 손짓을 멈추었을 때서야 비로소 시작되는 클래식의 카덴차를 사랑한다. 그 순간 만큼은 누군가가 자신의 시선으로만 ‘규정’해놓은 ‘강요적’ 감정이 아닌 ‘복합적인 감정’ 그 자체로 전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음악 안에서 나는 내 안에서 느껴지는 '무언가'를 굳이 '언어'로 번역하지 않은 채 그저 그대로 향유할 수 있다.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

노자가 '도'를 인간의 언어로 정의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정의하듯 내가 생각하는 음악 또한 '도'이자 '원리'이다.

언어로 정의되지 않는 그 무언가를 우리는 '느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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