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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연 Jan 14. 2019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에는 저마다의 각도가 존재한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를 평가하는 일도,

너는 나를 이만큼 사랑하니 그만큼 줘야 한다는 말도 없어야 한다.


사랑은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도, 변화를 강요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 오롯이 바라보고 물드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어떤 상업적인 생각, 욕구로 맺어진 관계가 아닌 '그저 그 사람이기 때문에' 좋고 소중하게 대하려는 마음이다.


"분명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근데 이것도 못해줘? 사랑하는 것 맞아?"


사랑하면, 뭔가를 해줘야 한다는 생각은 굉장한 착각이다.

사랑은 사랑 그 자체다.

무언가를 위해 이루어진 것도, 무언가를 통해 생기는 것도 아닌.


"날 정말 사랑한다면, 너에게 소중한 걸 줘. 같이 여행가자."


갓 스무살이 되었던 나에게 5살 연상의 그가 했던 말다.

나는 그의 말에서 모순을 느꼈다.

사랑하면 나의 소중한 것을 줘야 하는 건가.

그렇다면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가?

그는 자신의 소중한 것을 준다는 말은 없이 오로지 받기만 하려 했다.

주면 내 것은 없어지는데 그렇게 쉽게 이야기하는 그에게 싫증이 났다.

교제기간도 그닥 길지 않았고, 처음이었기에 조심스러웠다.


"사랑은 나 혼자 하는거야? 오빠야말로 날 정말 사랑한다면, 나의 소중한 걸 지켜줄 수 있어야지. 혹은 오빠도 오빠의 소중한 무언가를 공유하거나."


"네가 날 정말 사랑하는지에 대한 검증을 하고 싶어."


"검증이란 게 내가 내 모든 걸 주고 나는 텅 빈 상태로 남아있어야 비로소 그 사랑이 검증이 되는 거야?"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선 나에게 크고 소중한 것들을 포기하고 감내해야만 하는 거였나.

사랑을 마치 모종의 거래처럼 얘기하는 그의 말에 소름이 끼쳤다.

'나와 만나려면 얼마의 값을 치뤄야해. 그래야 비로소 사랑이 정산될 수 있어.'

그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실로 그런 말이 들리는 듯했다.

사랑은 어떤 것으로도 거래될 수 없다고 생각해왔다.

사랑은 고귀한 것이니까.

실로 어떤 것을 주고 받지 않는다해도 남아있는 관계가 가장 진실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서로에게 소중한 것일수록 오래오래 지켜주고, 바라봐주고 예쁘게 닦아주는 것이 사랑이라 생각했다.

좋아하는 것과 사랑의 차이는 이렇다.

좋아하는 것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얻고 싶지만 사랑은 분별할줄 아는 것.


이를테면,

좋아하는 남자에게 밥한끼 얻어먹을 수 있다면

사랑은 그사람의 주머니사정을 생각해서 몰래계산할 수도 있는것

이렇게 상대의 상황을 헤아리고 포용할 수 있는 시작이 사랑이다.




한때는 생각했다.

이성관계를 막론하고, 동성을 포함한 사람간의 관계에서 '이 사람을 정말 사랑하는구나' 판단하는 지표는

집밥과 바깥밥을 공유하는 관계의 거리라고.


바깥에서 밥을 먹는 관계는 별로 친하지 않은 사이에서도 가능하지만,

집에 초대해 밥을 퍼서 나눠먹는 관계는 그보다 좀 더 돈독하다.

나의 은밀한 공간에서 생활권을 공유하고 도란도란 앉아 반찬을 나눠먹는 시간이 긴장되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늘어져있는 물건과 냄새를 맡으며 서로의 생활을 공유하는 일.

그리고 내 생활을 공유하는 데 거북함보다는 설렘이 더 커진다면, 그게 사랑이 아닐까.


동성이라면 그게 돈독한 우정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아무에게나 집 초대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테니까.


그런데 얼마 전 생각이 바꼈다.

결혼을 한지 5년이 지난 친구로부터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같이 밥을 먹기로 하고, 약속장소를 잡았다.

'중간거리'인 강남역에서 만나는 게 좋겠다고 친구가 말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친구에겐 3살짜리 아들과 4살짜리 딸이 있었고, 강남까지 오려면 1시간이 훌쩍 걸렸다.


"아니야 내가 너희 집으로 갈게."


"집은 좀 그런데. 강남이 더 편할거같아."


"집엔 안 들어가고 앞 카페에서 만날래?"


"아니야. 강남역으로 갈게."


한때는 정말 친한친구였는데

나에게 너무 비밀이 많은듯하여 괜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친구를 만나 밥을 먹고, 맥주를 마셨다.

속이야기를 털어놓기 보다는 그저 누가 들어도 상관없을법한 겉이야기만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친구 핸드폰에 전화가 왔는데 두 번 모두 친구가 받지 않았다.

화면에는 '신랑'이라고 떠있었다.


"왜 안 받는거야?"


"오늘은 편하게 있고 싶어서."


나는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다.

친구의 마음을 오해했던 게 미안했기 때문이다.


결혼 직후 남편은 회사를 그만뒀다.

그러더니 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사업이 있다며 상의도 없이 추진했다.

이전 회사에서의 퇴직금을 전부 썼고, 나머지는 대출을 받았다.

하지만 불과 6개월만에 도저히 대출 이자도 갚을 수 없을 정도로 수익이 전혀 나지 않았다.

사업을 접었지만, 빚이 어마어마하게 남아있었다.

할 수 없이 원래 살던 집을 팔고 반지하 원룸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럼에도 아직도 남은 빚이 있단다.


그런데도 남편은 일을 하지 않고 매일 술만 마신다고 했다.


"돈은 어디에서 나서 술을 먹는데?"


울화가 치밀었다.

정말 예쁘고 착한 친구인데 마음이 찢어졌다.


"지연아 혹시 주변에 할 만한 일 없니?... 애기들 어린이집 보내고 뭐라도 해보려고.."


"찾아볼게.."


"응.. 고마워."


친할수록 공유를 많이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의 생각은 모순이었다.

속이야기를 많이하고, 은밀한 생활권을 공유할수록 상대에 대해 아는 것은 많아지겠지만

그만큼의 책임감도 커지는 법이었다.


아무리 사랑해도 모든 걸 공유하고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다.

진짜 사랑은 오히려 더 단순하다.

복잡하게 생각하고 얽혀있는 관계들은 사실 사랑하는 '척'만 하는 관계일지도 모른다.


상대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 과거 사진을 궁금해하고, 생활을 알고싶어하는 것들은

사실은 그 사람의 실제 속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순일 뿐이다.



때론 정말 친한 사람에게도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을 수도 있다.

나한테는 말할 수 있지 않냐고 서운해하는 관계보다는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마음이 좀 편해지면 연락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관계들이 정말 사랑이겠구나.


사랑의 의미가 부쩍 단순해진 요즘이다.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하려 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의도와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관계.


정말 사랑하면 단순해진다.

상대의 말에 물꼬를 틀지 않으므로.

그렇구나, 너의 생각은.

받아들이게 되고

자연스럽게 상대의 생각조차 사랑하게 되니까.

다툴시간이 아까워 더 사랑하려 하니까.



사랑이란 저마다의 각도를 존중해주는 일이다.

상대가 지키고 싶어하는 것들을 지켜주는 것.

그리고 상대의 마음을 기다려주는 일.


모든 것을 얻고,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할수록

마음이 한 발 물러나게 된다.


상대의 마음을 편하게 두는 것.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지지해주는 것.

자연스러움을 존중하는 일.


그것이 사랑.

그것이 마음.


사랑은 보상을 바라거나 평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니까

그를 더 알고 싶은 마음보다는

그의 자존감을 지켜주는 것.

그 사람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


보이는 것에 급급해

정작 보이지 않는 소중한 것들을 경시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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