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인연을 만난다.
많은 인연 중 몇몇은 유독 마음이 맞아 많은 것을 공유하고 공감하며 친분을 유지한다.
그리고 가깝게 지내기에, 특별했기에 한편으론 서운한 감정이 생기기도 한다.
그건 나나 상대방 중 누군가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상대와 내가 생각하는 방식과 살아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2년 전, 친구 아이의 돌잔치가 있었다.
그런데 나는 당시 친구의 도련님과 연애를 하다 이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돌잔치에는 분명 그가 참석할 거였고, 나는 그를 만나는 게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친구 계좌로 돈을 보내고, 전화를 했다.
"축하해주고 싶었는데 정말 미안해. 가진 않아도 정말 많이 축하하는 거 알지?"
"알지 알지 그럼."
전화를 끊기 전,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조금 서운하다고 했다.
그 말의 어조는 차분했고, 격양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그 어떤 격양 감보다 크게 느껴졌다.
"서운하다고? 나는 원래 한번 헤어지면 안 만나거든. 너도 마음 알 줄 알았는데."
"그래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가슴으로는 잘 안돼. 어차피 헤어졌으니까 서로 신경도 안 쓸 거고."
나는 내 선에서 최선을 다했다.
직접 참석은 못하지만, 진심을 전달했다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얼마나 뭘 더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갑자기 그녀가 멀게 느껴졌다.
전화를 끊고 몇 주간 서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서운하다고 했다.
나도 서운했다.
서로가 서운해하는 상황은 같았지만 이유는 달랐다.
그녀는 참석하지 않았음에 서운해했고, 나는 내 맘을 알아주지 않음에 서운했다.
그녀는 왜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왜 공감하지 않는 걸까.
나의 모든 마음을 다 주면서 만났던 친구였던지라 마음이 아팠다.
좋아했던 사람을 미워하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데 쓰이는 에너지가 컸다.
마치 누군가를 처음 좋아할 때 쓰는 에너지와 비례했다.
그래서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 그녀를 이해하기로 했다.
너는 왜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냐는 생각도,
내가 너라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텐데 하는 생각도,
나의 행동을 이해해달라는 요구도 모두 비웠다.
그녀에겐 그녀만의 이유가 있겠지.
신기하게도 생각만 바꿨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삶이 변했다.
편안했고, 안정적이었다.
그녀와 마음속 화해를 하고 며칠 후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잘 지내냐는 안부인사였다.
그녀도 그간 내 생각을 했겠지.
그러니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나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은 것이다.
그녀도, 나도 서로를 탓하지 않았다.
그러다 그녀가 말했다.
"내가 전에 말했었나. 나는 사실 헤어져도 친구처럼 지낸다고. 그래서 그랬나 봐. 그땐 그래서. 나라면 그냥 갈 텐데 왜 그러지? 싶었었어. 근데 내가 생각을 해봤거든. 너무 내 입장에서만 너를 생각했던 것 같아. 그래서 미안하더라. 그래 나는 정말 좋게 헤어졌고, 그 사람 공부한다고 해서 서로의 미래를 빌어주며 헤어졌던 거라 결혼하기 전까지는 친구처럼 지냈었지.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네. 그래서 나는 그 얘기를 하고 싶었어. 내 입장에서 생각해서 미안하다고."
서로의 환경이 달랐다.
생각이 달랐다.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없었던 게 아니라 그저 몰랐을 뿐이었다.
'오해에서 세 걸음만 물러서면 정말 이해가 된다.'
언젠가 어떤 책에서 이런 구절을 본 적이 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삶을 살았지만 적어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는 정말 맞는 말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해봤을 것이다.
절친한 사람이라고 믿었던 사람의 배신이라거나 오해로 생긴 상처들.
물론 상대가 정말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없고, 이기적인 성향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몰라서 그럴 수도 있다.
이기적인 성향이라는 것도 사실은 몇십 년 간 자신의 환경으로 살다 보니 자신의 환경이 편해져서 자신의 삶 위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관계에 있어서 상대에게 서운하여도 절대로 책망하지 말자.
너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거나 서운하다거나 실망했다는 말들.
뱉기는 쉽지만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나는 나만의 사정이 있고, 나름 배려를 해서 한 행동이었는데
소중한 사람으로부터 이해받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많이 서럽다.
당신이 당신의 지인으로부터 서운한 일이 생겼을 때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조용히, 가만히 그 일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말이다.
굳이 당신이 그 사람의 상황을 모두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저 공감하고, 받아들이며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따지거나
연락을 멈추는 것이 아닌, 그 사람이 왜 그렇게 행동해야 했는지를 이해해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살아온 환경이 달라서 그렇다.
누군가에겐 5만 원 정도는 푼돈일지라도,
어느 누군가에겐 귀한 돈이듯이.
세상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시간될 때 인터넷 뉴스에 달린 댓글들을 유심히 봐라.
a: 나는 그래도 저 행동은 이해가 안 되는데.
b: 저렇게 행동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저도 비슷한 일 있어봐서 알아요.
c: 저 사람이 저 행동을 한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에요. 제가 아는데 찌라시에 의하면~
신기하게도 같은 상황, 같은 기사인데도 사람들의 의견이 갈린다.
그에 대해 a야, b야 너는 왜 그렇게 생각하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각자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쩌면 내가 당신에게, 혹은 당신이 나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서운함을 느낄수록 건강한 관계가 아닐까?
그만큼 서로의 차이점을 맞춰가려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서운한 감정은 혼자 생각하도록 하자.
'서운하다'는 말을 풀어낸다 하여 서운한 상황이 모두 해결된다면 좋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서운하다는 말을 들은 사람도 뱉은 사람도 가슴속에 작은 앙금을 갖고 살게 된다.
그 앙금은 추후 아무리 노력해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다.
말은 뱉는 순간 주워 담을 수 없고, '서운하다고? 고작 이런 거에?' 상대방 마음의 파장이 커지게 된다.
어떤 경우라도 책망하지 말 것.
그 사람은 그렇구나, 무슨 이유가 있겠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
상대의 상황이 아닌 마음을 이해할 것.
그럼에도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차라리 선을 두고 천천히 멀어질 것.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해서 자신의 마음이 불편할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아니다.
오히려 가장 깔끔하고 편하게 살 수 있다.
누군가에게 돌을 던지거나 책망하면 그 순간은 후련할지라도 언젠가 다시 돌아오기 때문이다.
자신이 노력함에도 힘든 관계가 있다면 그 사람은 인연이 아니다.
아닌 인연은 보내줄 수도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