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문8
지금도 음악을 즐겨 듣지만 생활전선에 뛰어들기 전까지 음악을 정말 많이 들었다. 가끔 나더러 청력이 안 좋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음악을 너무 크게 들은 탓에 생긴 문제는 아닌가 싶기도 할 정도로 몰두했던 적도 있다. 클래식부터 국악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맹목적으로 들었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고 한 물 가버린 노래들이지만 제목만 들어도 웃음이 나오는 노래들이 참 많다.
예술이 사람을 취하게 만들어서인지 젊은 피가 끓어서인지 호르몬의 장난인지 ‘차세대 이수만이 되겠다’는 원대한 꿈을 꾸게 되어 한때 무려 2년 휴학을 결정했다. 부모님과 관련해서 한 두 차례 말다툼을 벌였지만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내 인생이니까 내가 알아서 해”라는 늦둥이의 말로 결론 지어졌다. 힘겹게 일하시는 부모님은 그 뒤로 휴학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휴학을 하며 아르바이트를 통해 번 돈으로 DJ, 작곡 학원을 다니면서 랩과 R&B를 모창하고 창작했다. 학원비와 장비 값에 허덕이며 없는 시간에 데이트까지 하면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세월이 정신 없이 갔다. 쉬는 시간에 음악을 듣고 또 듣고 가사를 열심히 썼다.
힘든 일을 마치고 휴학이 1년 6개월쯤 되는 쉬는 날 유튜브에 창작물을 올렸다. 댓글이 달렸다. “이건 아니예요. 소리를 지르시는 것 같아요” 댓글을 읽고 노래를 다시 들어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날따라 나는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그날의 짧은 평가가 객관적인 평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올린 음악들을 다시 돌려 들었다. 발전 없고 조잡한 결과물들이 전시돼 있었다. 갑자기 너무 창피했다. 며칠 못 가 동영상을 다 내렸다. 아차 다 들통났다. 나는 재능도 열정도 실력도 없는 사람인 것을.
세월이 흐르고 나중에 어머니는 나에게 “혼자서는 절대 아무것도 못해.” 라고 살짝 말해줬다. 그제서야 귀가 열렸다. 나의 결정적 문제는 여러 사람이 회사를 이뤄 나눠서 하는 일을 모두 다 혼자서 하려 하는 발상이었다. 휴학을 하면서 동아리를 할 수도 있었고 협업을 할 수도 있었다. 아마추어 음반을 만들어 회사에 시험을 보는 길도 있었다. 왜 혼자서 어설프게 짜깁기해 사람들이 듣지 않는 곳에 올리면서 도전한다고 생각했을까.
사실 당시의 나는 학교에서 평가 받기 싫어 자취방으로 음악으로 도망쳤다. 가족들은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병역도 미루고 갑자기 음악 한다고 말했던 나 같았던 선배들이 없었겠는가. 나도 많은 이들이 밟았던 전철을 밟았다. 사회로부터 고립되더라도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껴야 살아가야 하는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길로 빠졌다.
조그마한 언론사의 수습기자가 된 지금은 기사를 쓰면 가끔 내가 여전히 작사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영 쓸모없었던 시간은 아니었나 보다 생각한다. 몇 안되는 조회수를 보면서, 언젠가 헤밍웨이 같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는 꿈을 꾸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