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영배 Sep 20. 2022

꽃마리

Korean Forget Me Not

예전에는 보라색을 좋아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좋아하는 색이 하늘색 같은 남색, 즉 코발트블루(cobalt blue)라는 색깔이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요즘 구입한 옷도 코발트색 계열이 많아졌네요. 이유는 정확히 모릅니다. 예전부터 산보다는 바다를 좋아하는 것이 원인이라면 그럴 수도 있으리라 추측합니다. 코발트색 하늘과 그런 하늘빛을 온전히 받아 머금은 바다색이라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늘과 바다가 하나가 되는 합일의 순간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늘은 이상과 동경의 세계요 바다는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는 수용의 세계입니다. 세상 모든 일이 희망을 품지 않고는 살아가기 힘들고 그러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긍정적인 태도가 아닌가 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하나가 될 때 우리는 행복이라는 것을 가질 권한을 갖는 게 아닐까요? 그렇다고 실제 행복을 쟁취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기는 합니다. 행복은 그냥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간다는 사실을 깨우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경험이 필요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코발트블루는 희망과 긍정적 수용을 표현하기에 우리가 행복을 만들어가면서 충족될 때 느끼는 색깔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올해 매화와 개나리가 거의 피어난 3월 말의 봄, 제가 사는 중부지방의 북쪽에서는 아직 이른 봄꽃을 시샘하는 꽃샘추위 유난히 매서운데, 그것도 모자라 때늦게 춘설(春雪)까지 펄펄 내리기까지 했습니다. 유난히 변덕을 부리는 날씨에 참 적응하기 힘들었습니다. 저만 그랬을까요. 저보다 알몸으로 밖에서 피어난 꽃들은 오죽했을까요.  

    

예전부터 봄의 대표적 꽃으로는 매화와 개나리, 진달래를 뽑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른 봄의 색깔은 대개 흰색이나 노란색입니다. 실제로 이른 봄에 피는 꽃들은 매화로 대표되는 흰색이나 개나리로 대표되는 노랑 계통, 진달래로 대표되는 분홍색 계통이 많습니다. 매화는 귀족들의 시나 그림의 소재가 되었고 개나리나 진달래는 서민들의 꽃이었습니다.  

         

냉이꽃

봄길을 걷습니다. 하얀 냉이꽃과 노란 꽃다지가 서로 자신이 최고의 봄 풀꽃이라고 다투고 있습니다. 그런 행복한 다툼을 즐기며 걷고 있습니다. “저기요!” 누군가가 저를 부릅니다. 뒤를 돌아다봅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저기요!” 다시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주 작고 여린 목소리입니다. 문득 발밑에 작은 꽃이 보입니다. 너무 작아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하늘을 닮은 하늘색 꽃이었습니다. 봄에는 온통 노란색과 흰색 꽃의 잔치입니다. 그런데 하늘색 꽃이라니요? 그것도 진한 파란색도 아닌 파스텔 톤의 아름다운 빛깔을 하고 바닥에 누워있는 꽃이란! 그 꽃을 발견한 기쁨과 신비로움에 눈을 마주하고 앉았습니다. “네가 불렀니?” 하고 물으니 “그래요. 제가 불렀어요.” 합니다. “와! 감사해요, 제 말을 들어준 사람은 이제까지 없었어요. 당신이 처음이에요. 당신을 사랑하게 됐어요.” 저는 대답했습니다. “그래 나도 너를 찾아서 반가워. 내가 너의 사진을 찍어도 되겠니?.” 폰카에 담고 일어서려 하는데 그 꽃이 말합니다. “제 말씀을 듣고 가세요. 제 이름은 ‘꽃마리’랍니다. 사람들이 제 꽃말을 ‘나를 잊지 마세요’라고 붙여주었어요. 그래서 저를 영어로 ‘한국 물망초(Korean Forget Me Not)’라고 부른답니다. 저를 마음에 담고 가서 잊지 말아 주세요. 당신이 그리울 거예요. 고마워요.” 그렇게 우린 처음 만났습니다. 그렇게 너를 만난 나의 기쁨이란!  

             

도르르 말려있는 꽃봉오리

마음을 닮아 연분홍인데

설레는 가슴 읊어보면

아무도 보지 않는 서러움에

하늘을 닮아 파란색이다

서 있는 사람들은 결코

만날 수 없는 작은 꽃

그래도 버릴 수 없는

노란 꿈을 부여안고

실바람에도 꽃마리

가로눕는다.

 -김종태, <꽃마리> 전문   

            

그렇습니다. 김종태 시인이 말했듯이 ‘서 있는 사람들은 결코 만날 수 없는 꽃’입니다. 워낙 작아서 허리를 깊숙이 숙이거나 쪼그리고 앉아야만 볼 수 있는 꽃입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볼 수 있는 꽃입니다. 제가 본 꽃 가운데 가장 작은 꽃은 갈퀴덩굴꽃입니다. 채 2mm도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2~3mm 정도 되는 꽃이 꽃마리입니다. 봄에 함께 피어나서 영역 다툼을 하는 냉이꽃이나 꽃다지보다도 작아서 고개 숙이고 겸손해져야만 볼 수 있는 꽃이랍니다.  

네잎갈퀴
꽃다지


꽃마리는 파란색입니다. 그는 개나리나 민들레처럼 노란색이 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지 못해서 그런 꿈을 부여잡고 있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군요. 그러나 제 생각에 꽃마리가 하늘을 닮은 파란색을 띠게 된 이유는 시인이 처음에 고백했듯이 아무도 봐주지 않는 서러움 때문입니다. “꽃마리야. 난 하늘을 닮은 파란색을 더 좋아하니 서러워 말렴. 이제는 내가 너를 기억해 줄 테니 서러워 말렴!”

                                                                    

꽃마리는 들이나 밭둑, 도시의 공원이나 아파트의 정원, 길가 어디에서든지 잘 자랍니다. 꽃은 연한 하늘색으로 피고 너무 작아서 나비나 벌이 찾기에는 무리인 것 같습니다. 보일 듯 말 듯 개미와 같이 작은 곤충을 유혹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꽃마리의 본래 이름은 ‘꽃말이’였다고 합니다. 가느다란 줄기 끝에 말려있는 형상이었다가 마치 태엽처럼 풀리고 분홍빛 꽃망울이었다가 꽃이 피면 하늘색이 됩니다. 잎을 문지르면 오이향이 난다고 하는데 직접 해보지는 못했습니다. 작은 생명이지만 제가 함부로 꺾을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꽃마리의 전설은 견우와 직녀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사랑에 빠져서 소를 키우고 베를 짜는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게을리 한 견우와 직녀에게 옥황상제는 벌을 내립니다. 바로 하늘의 넓은 강 은하수 건너에 둘을 서로 갈라놓고 칠월 칠석날이 되어야 일 년에 오직 한 번 오작교를 건너서 둘을 서로 만나게 한 것입니다.   

   

사람들과 정령들은 견우와 직녀를 불쌍히 여겼지만, 어렵고 두려운 존재인 옥황상제에게 둘을 함께 해달라고 직접 청하지 못했습니다. 맑고도 큰 강인 은하수에는 아름다운 백조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백조는 우리가 흔히 별자리인 '백조자리'라고 알고 있는 그 백조인지라, 지상의 어떤 백조들은 감히 견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특히 백조의 꼬리는 눈부신 파란빛으로 아주 예뻐서 은하수 근처에 사는 천인(天人)들은 종종 이 백조에게 강을 밝혀주는 등대 역할이나 건너편에 소식을 전해주는 일을 맡기곤 했습니다. 백조는 견우와 직녀의 소식도 둘에게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백조는 하늘나라에 사는 누구보다도 둘의 사랑이 얼마나 애틋하고 깊은지 알게 됐습니다.

     

백조는 견우와 직녀를 서로 만나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은하수를 날아다니는 새이니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자신의 날개에 견우를 숨겨 은하수를 건너 직녀에게 수시로 데려다주었습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은하수를 관리하던 군사가 백조의 파란빛 꼬리가 자주 은하수를 넘나드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옥황상제에게 알렸습니다. 결국에는 옥황상제의 명을 어기고 둘을 만나게 해 준 백조는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억지로 잡히는 과정에서 그만 꼬리 깃털을 뜯겨 파랗게 빛나던 꼬리 빛이 흐릿해지고 말았습니다. 백조는 옥황상제의 명에 따라 다시는 은하수 밖으로 나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백조가 잡히면서 빠진 파란 꼬리 깃털이 잘게 부서지며 지상으로 떨어져 꽃이 되었다고 하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 꽃을 꽃마리라고 부르게 되었답니다.

         


오늘 다시 4월이 되어 우리 동네 공원과 아파트 정원을 돌아다니면서 작고 야리야리한 코발트색 꽃마리가 떼를 지어 점점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봄추위를 견뎌내고 작지만 아름다운 하늘빛 꽃을 보여주는 저 꽃마리를 어쩔 수 없이 겸손하게 허리를 굽히고, 그것도 잘 안 보여 쪼그리고 앉아서 핸드폰 카메라로 확대하여 들여다봅니다. 눈길을 끄는 화려한 봄꽃들이 저 잘난 듯 뽐내고 있지만, 허리 굽혀 들여다보게 하는 작은 풀꽃들도 예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가던 길 멈추고 신비한 코발트블루를 뽐내고 있는 꽃마리와 오랫동안 눈 맞춤하고 해 넘어가는 줄 모르고 있습니다.

                                                                                


이전 11화 누리장나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