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예전에 국회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근 10년 가까이 국회에서 일하였으니까 잠깐은 아니네요. 제 인생의 3분의 1쯤은 국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일한 것 같습니다. 그 시간 동안 많은 일화가 있고 할 말은 많지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최소한 제가 일한 직장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좋은 모양새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큰 부담 없는 작은 일화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국회에서 벌어지는 일 가운데 ‘의원총회’라는 것이 있습니다. 국회의원들만 참석하여 원내의 문제나 당내의 문제를 토론하고 당론을 모으고 결정하는 회의체입니다. 국회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의원총회에 들어가 어떤 말이 오가고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많은 의원이 차례대로 나와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얼마 후 여기저기서 나이 드신 분들의 이런 고함이 나왔습니다. “고마해라!” 경상도 사투리로 그만하라는 뜻입니다. 이 고함이 나온 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고 의원총회는 끝이 났습니다. 예전 이야기입니다. 당시에 젊은 의원들이 대거 당선되어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모든 것을 한 마디로 결정하시던 분들은 다 사라지고 없습니다.
왜 제가 이 이야기를 했느냐 하면 “고마해라!”라는 고함 때문입니다. ‘고마리’라는 풀꽃이 있습니다. 이 고마리라는 풀은 습지나 냇가 등에서 가을에 피어나는 꽃인데 워낙 무성하게 자라다 보니 이제는 그만 피어나라고 ‘그만이’ 또는 ‘고만이’라고 부르던 것이 ‘고마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농사짓는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잡초 가운데 하나가 고마리입니다. 낫으로 베어도 베어도 금방 또 자라 도랑을 뒤덮어 버리는 천덕꾸러기입니다. 농부들은 고마리가 서식지를 넓혀가는 것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고마해라!”라고 소리치게 될 것만 같습니다.
나 하나 꽃 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 피고 나도 꽃 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 조병화, <나 하나 꽃 피어> 부분
조병화 시인의 유명한 시 <나 하나 꽃 피어>의 일부분입니다. ‘네가 꽃 피고 나도 꽃 피면 꽃밭이 된다.’라고 하셨는데 고마리가 그렇게 피다가 그만 꽃밭이 넘쳐 엄청나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제발 그만!’ 이렇게 외치고 싶을 만큼 정도가 지나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습니다. ‘모든 일에 넘침은 모자람만 못하고, 잘난 척하는 것은 아니하는 것만 못하다.’라는 말이 고마리를 통해서 얻는 교훈입니다.
어원적으로 고마리에서 ‘고’는 ‘물’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물에 사는 ‘만이’ 즉, 물에 사는 풀이라는 뜻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고마리는 수질 정화 능력이 탁월하여 ‘고마운 이(풀)’이라 부르다가 ‘고마리’로 굳어졌다는 설도 있습니다. 제가 매년 만나는 고마리를 공원 하천인 소리천입니다. 이 소리천 상류는 생활하수와 건설 폐수가 흘러나와 오염이 심하고 때로는 역겨운 냄새도 납니다. 여름이 지나면서 그런 개천에 온통 고마리가 가득 피어납니다. 자연히 고마리가 물을 정화하여 고마리꽃 단지를 지나면 작은 물고기들이 물결을 따라 춤추며 따라 올라갑니다. 고마리 뿌리가 엄청 발달하여 물을 정화시켜주었기 때문입니다. 고마리는 이렇게 자연정화를 해주는 더없이 소중한 존재이지만 잡초로밖에 취급되지 못합니다. 그래도 고마리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관계없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정말 고생하며 인간에게 좋은 역할을 하지만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숱한 민초(民草)들과 닮았습니다.
꽃은 8월~9월에 작지만 앙증맞고 예쁜 꽃이 흰색, 연한 분홍색 혹은 흰색 꽃에 끝에만 연분홍색 물들인 것과 같은 종류들이 있습니다. 가지 끝에 여러 개가 둥글게 뭉쳐 달려서 핍니다. 고마리의 꽃은 꽃봉오리가 벌어지는 열린 꽃과 꽃봉오리가 닫혀있는 폐쇄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꽃봉오리가 열린 꽃들은 벌이나 나비 같은 곤충들의 수분 활동을 통해 씨를 맺는 방법으로 살아가며, 꽃봉오리가 닫힌 상태로 있는 꽃들은 자가수분을 통해 씨를 맺습니다. 그래서 고마리는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생존과 번식능력이 탁월합니다. 고마리 꽃말이 ‘꿀의 원천’이라고 합니다. 이 작은 꽃 속에도 곤충들을 부르는 달콤한 꿀이 많이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앞에 있는 사진처럼 고마리 꽃은 참 아름답고 고귀한 들꽃입니다. 그러나 사실 충격적 이게도 고마리는 꽃잎이 없습니다. 꽃잎처럼 보이는 것은 꽃받침입니다. 고마리꽃은 거의 며느리밑씻개(사광이아재비)와 비슷하여 언뜻 보면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고마리 잎은 둥근 듯 긴 모양이나 방패 모양이고, 며느리밑씻개는 긴 삼각형입니다. 며느리밑씻개는 서식지가 달라 물속에서 피어나지 않습니다.
날카로운 가시로 무장한 며느리밑씻개
산책길에 꽃향기가 좋아 줄기를 잡고 향기를 맡다가 손에 상처만 남기게 되었습니다. 고마리 줄기는 가시로 덮여 있는 걸 그만 향기에 취해 깜빡 잊었습니다. 상처를 입게 되니 복효근의 <상처에 대하여>라는 시에서 모든 상처가 고마리를 닮았다고 토로한 말이 생각나는군요. 향기가 배어나는 사람에게는 가슴에 상처가 있다는 것, 하~ 정말 그렇습니다. 고마리의 가시에 베인 제 상처에서도 고마리의 꽃향기가 배어나기를 기대해봅니다. 제 수술 상처에서도 꽃향기가 나기를 기대해봅니다. 제가 입은 수많은 마음의 상처에서도 꽃향기가 나기를 기대해봅니다.
오래전 입은 누이의
화상은 아무래도 꽃을 닮아간다
젊은 날 내내 속 썩어 쌓더니
누이의 눈매에선
꽃향기가 난다
요즈음 보니
모든 상처는 꽃을
꽃의 빛깔을 닮았다
하다 못해 상처라면
아이들의 여드름마저도
초여름 고마리꽃을 닮았다
오래 피가 멎지 않던
상처일수록 꽃향기가 괸다
오래된 누이의 화상을 보니 알겠다
향기가 배어나는 사람의 가슴속엔
커다란 상처 하나 있다는 것
잘 익은 상처에선
꽃향기가 난다.
- 복효근, <상처에 대하여>
우리 동네 소리천에는 고마리가 지천으로 깔려 있습니다. 고마리꽃밭을 보면 페르시아 융단을 깔아 놓은 것 같이 환상적이어서 들어가 눕고 싶어 집니다. 붉은색과 흰색 꽃, 혹은 두 가지가 섞인 꽃, 별같이 작고 앙증맞은 꽃, 개천가를 산책하던 나는 쪼그리고 앉아 고마리와 눈을 맞추고 ‘꽃 수다’를 떨다 돌아왔습니다. 멀리 있는 꽃은 필요 없어요. 하찮고 보잘것없는 꽃이라도 내 옆에 있는 꽃이 제일 예쁜 꽃이지요.
올가을엔 집 주변이나 시골 개천에 나가서, 마치 입술에 연지를 찍어 바른 옛 여인의 고운 자태처럼 매혹적인 고마리의 모습을 감상하면서 무르익어가는 가을을 즐겨보는 건 어떨까요? 거기에 국현이 시를 쓰고 작곡한 가곡 <고마리꽃>을 합창으로 들으면서 걸으면 가을 향기가 더욱 짙어질 것 같습니다. 저 가을 구름에 실려 하늘로 꽃잎과 함께 마음 한 조각 안겨 떠나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