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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배 Sep 25. 2022

누리장나무

아낌없이 주는 나무


쉘 실버스타인이 1964년 쓴 <아낌없이 주는 나무(The Giving Tree)>라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소설 같기도 하고 동화 같기도 한 책입니다. 쉘 실버스타인은 매우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명함에는 시인, 아동 문학가, 만화가, 작사·작곡가, 극작가와 같은 많은 직함이 적혀도 무방할 정도로 폭넓게 활동했습니다. 쉘 실버스타인은 자신의 재능을 이 작품에 아낌없이 잘 담아냈습니다. 여러 분야의 재능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그의 작품은 시적인 문장에 해학과 재치가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직접 그린 섬세한 그림들이 재미와 감동을 더욱 확대했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 등장하는 나무는 사과나무입니다. 그는 나무를 ‘She’라고 표현하여 어머니의 무한사랑을 추측하게 하고 있습니다. 나무가 인간에게 베물어 주는 희생과 배려를 단계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먹을 것이 필요할 때 과일을 주고, 집이 필요할 때 가지를 주고, 멀리 떠나고 싶을 때 줄기를 잘라 배를 만들게 해주고, 먼 훗날 노인이 돼서 지쳐 돌아왔을 때 그루터기로 휴식할 장소를 주는 나무. 사과나무를 통하여 우리에게 베푸는 기쁨과 진실한 사랑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도대체 세상 어디에 이런 사랑이 있을까요? 모든 것을 주고 나서 이제는 더 줄 수 없어 오히려 미안하다고 하다니요. 이런 사랑을 부모와 자식의 관계 이외에 조금이라도 엇비슷한 것이라도 찾아볼 수 있을까요? 개인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이 책은 잘 동화(同化)하기 어려운 이야기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헌신적인 사랑이 더욱 가치 있게 보이는 것입니다. 어린싹부터 열매와 가지, 줄기까지도 다 주고 겨우 그루터기만 남겨진 채로 소년에게 모든 것을 주는 나무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요?     

     

요즈음 부모는 자식들에게 무조건적 헌신보다는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노년에도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논리가 앞서고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으면 철없는 제 아이들과 늙으신 부모님의 자식에 대한 헌신의 모습이 떠오르며 가슴 한복판에 응어리가 생깁니다. 시대는 빨리 변해가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 책이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쉘 실버스타인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사과나무를 주인공으로 했지만 저는 누리장나무를 꼽고 싶습니다. 누리장나무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인간에게 내어주는 대표적인 나무의 하나입니다. 어린잎, 뿌리, 줄기, 성숙한 잎과 같은 모든 것들이 인간에게 유용하게 쓰이기 때문에 저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누리장나무를 선정했습니다.   

  


누리장나무는 이름도 참 많습니다. 지방마다 달라서 개나무, 구릿대나무, 누리개나무, 누룬나무, 개똥나무, 개낭, 개똥낭, 누루대라고도 부른다고 합니다. 누리장나무의 꽃은 어디에 놓아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꽃은 붉은색 꽃받침의 끝에 흰색으로 피며 팔랑개비처럼 5갈래로 깊이 갈라집니다. 거기에 또 열매가 특이합니다. 붉은색의 꽃받침에 싸여 있다가 밖으로 나와 겉으로 드러나는데 마치 사파이어 보석 같은 느낌을 줍니다. 이 나무는 줄기 전체에서 누린내가 나는데, 특히 봄철에 새로 올라오는 새순에서는 더 심하게 납니다. 그래서 누리장나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새로 올라온 잎과 줄기는 나물로 식용하고 나무의 뿌리와 줄기, 그리고 잎은 약재로 쓰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고 한 것입니다.     


누리장나무는 식용으로도 유용합니다. 봄철 새로 올라온 어린 순은 나물로 먹는데, 어린 순에서는 누린내가 나지만 끓는 물에 데쳐서 물에 하루 정도 담가 누린내를 제거하고 나면 오히려 고소한 맛이 납니다. 생잎만으로 김치를 담가 먹거나, 깻잎장아찌를 담그듯이 간장을 끓였다가 미지근하게 식혀 장아찌를 담가 먹어도 되며, 데친 잎으로 쌈을 싸서 먹거나 무치거나 볶아서도 먹고, 말렸다가 묵나물로도 먹습니다. 씹을수록 고소한 감칠맛이 나는 나물이 됩니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민간이나 한의학에서 이 나무의 모든 부분을 거의 만병통치약에 가까울 정도로 많이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일일이 확인할 수 없는 분야이니 꼭 의사와 상의한 후 드셔야 합니다. 민간이나 한의학에서 들고 있는 이 나무의 약효는 관절염, 혈압 강하 작용, 진통작용, 신경통, 진정 작용, 고혈압, 풍습(風濕)에 의한 팔다리가 아픈 증세, 반신불수, 편두통, 이질, 치질, 각종 종기, 류머티즘으로 인한 몸의 통증, 습진, 땀띠로 인한 가려움증, 무좀, 아토피 피부염, 간기능 개선, 생리통, 식체(食滯), 정신불안을 동반한 소아 허약증세, 타박상, 천식, 치통, 두풍, 이질, 탈장, 화상, 설사, 만성기관지염, 학질(말라리아)을 다스리는데 약효가 있다고 합니다(인터넷에서 추출함).

    

누리장나무에 얽힌 전설도 있습니다. 전설의 핵심은 이 나무가 학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옛날 중국의 상산이라는 곳에 암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엔 스님이 한 분이 있어서 날마다 암자 근처의 마을로 시주를 얻으러 다녔습니다. 어느 날 스님이 학질(말나리아)에 걸려 추웠다가 더웠다 하며 갈수록 몸이 여위어 갔습니다. 결국에 스님은 아픈 몸을 이끌고 산을 내려가 시주를 하러 다녔지만, 그 누구도 스님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습니다. 학질의 고통과 배고픔을 참아가며 마을을 돌다가 어느 몹시 가난한 집을 들어갔더니 주인은 곡기는 없다고 하면서 자신이 배고파 캐온 나무뿌리로 쑨 죽을 한 그릇 주었습니다. 스님은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나무뿌리 죽을 정신없이 먹고는 주인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절로 돌아왔습니다. 그 나무뿌리 죽을 먹은 뒤로는 학질이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며칠이 지나도 고통이 없어지자 스님은 학질이 다 나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한 달쯤 지나서 다시 학질의 고통이 시작됐습니다. 스님은 틀림없이 가난한 집에서 먹은 나무뿌리 죽이 학질을 낫게 한 것이라 여기고 다시 그 집을 찾아가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마을 주민이 가르쳐준 나무뿌리를 캐어 달여 먹고 금세 또 병이 나았습니다. 스님은 그 나무를 절 주위에 심어두고 날마다 죽을 끓여 먹었더니 다시는 학질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 뒤부터 스님은 시주를 얻으러 돌아다니다가 학질 환자를 보면 그 나무로 학질을 고쳐주니, 상산의 암자에 사는 스님이 학질을 잘 고친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환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 나무는 그때까지 이름이 없었으나 상산의 암자 주위에 심어 널리 퍼졌다 하여 ‘상산’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누리장나무는 저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꽃나무입니다. 이렇게 아낌없이 모든 것을 다 주는 나무인데도 나무에서 누린내가 난다는 이유로 누리장나무라는 변변치 못하고 별로 아름답지 않은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저렇게 아름다운 꽃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백합처럼 달콤한 향기까지 발하니 그 이중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혹 달콤하지만 씁쓰레한 이별의식을 준비하는 것일까요?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하기 위한 장치일까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후손을 만들어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아부어 벌과 나비를 유혹하는 향기일지도 모릅니다. 이별의 아픔을 통하여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내는 식물의 영원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파이어를 딞은 예쁜 누리장나무 열매


저는 혹시 남들에게 누리장나무처럼 별로 달갑지 않은 냄새를 풍기는 그런 사람이 아닐까 걱정이 되곤 합니다. 그러나 제가 아무리 아프고 구겨진 인생을 살아왔더라도 누리장나무처럼 예쁜 꽃을 피우고 사파이어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더없이 기쁘지 않을까 합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제가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남을 위해 헌신하며 봉사하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이웃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제 몸에서는 좋은 향기가 날 것이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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