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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배 Sep 28. 2022

바보여뀌

내가 제일 바보같이 산 것 같아요

                                                         

‘바보’ 하면 누가 떠오르세요?    

  

중년의 나이가 된 사람이라면 심형래의 ‘영구’를 떠올릴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심형래의 ‘영구’의 뒤를 이은 이창훈의 ‘맹구’를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더 나이가 든 사람이라면 나도향의 소설의 주인공 ‘벙어리 삼룡이’나 김유정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인 ‘나’를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혹 서양 영화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포레스트 검프’를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보 이야기를 쓰면서 혹시라도 정신지체장애인을 비하한다고 비난받을까 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바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장애인을 비하하거나 폄훼할 의도는 전혀 없으니 양해 바랍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뇌병변 장애로 고통을 안고 살고 있습니다.    

 

드라마 <여로>의 한 장면(출처 : 네이버 이미지)


뭐니 뭐니 해도 바보의 원조는 1972년도에 KBS 일일 연속극인 <여로>에 등장하는 장욱제가 연기한 ‘영구’ 일 것입니다. 심형래의 유명한 ‘영구’도 실제로는 장욱제의 ‘영구’를 모티프로 재창조한 것에 불과합니다. 혹시나 드라마 <여로>를 모르시는 분이 계시면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시길 권합니다. 그러면 얼마나 대단한 드라마였는지  수 있을 것입니다.  

   

드라마 <여로>는 그때 추정 시청률이 무려 70%에 달했던 전 국민이 사랑한 불멸의 드라마입니다. 그 시절 상황을 생각해보면 사실상 70% 이상이었을 것 같습니다. 거의 안 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집집이 TV가 있던 시절이 아니라서 <여로>를 하는 시간만 되면 TV 있는 집에 사람들이 다 몰려들었습니다.

     

실제로 시청률을 집계하기 시작한 뒤로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작품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1997년 KBS2 주말드라마 <첫사랑>입니다. 참고로 2005년 닐슨미디어에서 발표한 역대 1위부터 10위까지의 시청률 기록은 2014년까지도 변함이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아래 순위에 해당하는 드라마는 몇 개 바뀌었지만, 상위 10위까지는 변함이 없습니다. 아마도 케이블TV와 같은 미디어 매체들이 많아지면서 상대적으로 공중파방송의 시청률이 분산되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 역대 최고시청률 드라마 Top10 (2005년 닐슨비디어 및 2014년 영상컨텐츠 제작 사전 자료)     

1위 - 첫사랑 (KBS2) ------------- 65.8% (1997년 4월 20일)

2위 - 사랑이 뭐길래 (MBC) ------- 64.9% (1992년 5월 24일)

3위 - 모래시계 (SBS) ------------ 64.5% (1995년 2월 6일)

4위 - 허준 (MBC) --------------- 63.7% (2000년 6월 27일)

5위 - 젊은이의 양지 (KBS2) ------ 62.7% (1995년 11월 12일)

6위 - 그대 그리고 나 (MBC) ------ 62.4% (1998년 4월 12일)

7위 - 아들과 딸 (MBC) ----------- 61.1% (1993년 3월 21일)

8위 - 태조 왕건 (KBS1) ----------- 60.2% (2001년 5월 20일)

9위 - 여명의 눈동자 (MBC) ------- 58.4% (1992년 2월 6일)

10위- 대장금(MBC) --------------- 57.8% (2004년 3월 23일)     

     

드라마 <여로>에 대해 모르는 독자 여러분이 많을 것 같아 잠깐 소개하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줄거리는 대략 이렇습니다. 불우한 운명 속에 태어난 분이(태현실)라는 여인이 가난에 못 이겨 술집 작부, 사창가를 전전하다 영구(장욱제) 집안의 씨받이로 들어갔으나 시어머니(박주아)의 구박으로 온갖 풍상과 수난을 겪고, 전쟁으로 생이별했다가 결국 다시 만나 행복을 찾는 내용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드라마 <여로>는 TV 드라마에서 다시는 깨지기 어려운 70%에 달하는 시청률(추청)을 기록했으며, 당시 방송시간인 저녁 7시 30분이 되면 거리가 썰렁하고 택시도 영업을 멈추기도 하고, 영화 관객이 영화 보다가 여로를 보려고 나가는 바람에 영화 상영을 임시로 쉬기도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입니다. 드라마에 집중하다 도둑이 물건을 훔쳐 가도 몰랐다는 사건도 있었고, 밥을 태워 먹은 집들이 속출했다고 합니다. 그때는 요즘처럼 집집이 TV가 없던 시절이라 TV가 있는 집 방안 가득 모여서 볼 정도였습니다. 저도 집에 TV가 없어 처음에는 이웃집이나 만화 가게에 가서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다행히도 우리 집은 부자는 아니었지만, 당시에 금성사에서 만든 자바라 문에 잠금장치까지 달린 TV를 사서 집에서 보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여로(女路)’, 프로그램 이름이 말해주듯이 한 여자의 일생을 통해서 일제강점기부터 우리 민족의 삶의 애환을 그린 프로그램이라 가련한 운명의 여자 주인공이 당연히 중심이었던 이 프로그램이 뜻밖에도 남자 주인공 영구가 드라마의 인기를 이끌어가면서 여자 주인공을 비롯한 다른 출연자들도 덩달아 인기가 높아졌습니다. 영구 역을 맡은 배우 장욱제는 특유의 연기력과 애드리브를 통해 놀라운 연기력을 보여 주어 날이면 날마다 시청자들은 여로를 보지 않으면 하루를 넘길 수 없었습니다.

     

1960년대까지 영화관을 찾은 사람이 있어도 <여로> 방영시간이 되면 영화관 복도나 휴게실 등에에 있는 TV를 보러 나가는 바람에 영화 상영을 중단해야 했다고 합니다. 남자들의 퇴근 시간이 빨라져 가정주부들의 마음이 편해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주인공 영구가 울면 따라서 울고 바보짓을 하면 따라서 하면서 주인공들과 동질감을 갖기도 했습니다.

     

영화 <여로> 포스터(출처 : 네이버 이미지)

이로부터 라디오와 영화의 시대가 가고 TV의 시대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거금의 돈을 주고서 TV를 사고, 없으면 빚을 내어서 사는 사람도 많았다고 합니다. 한 편의 드라마가 사람들 생활양식까지도 바꾸게 한 생생한 기록입니다. 1970년대를 거치며 80만 대였던 TV가 600만 대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니 드라마 여로의 힘은 정말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사실 그때의 시청률 70%는 정확한 것은 아니고 오직 추정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시청률 자체가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이웃집이나 다방, 만홧가게를 비롯한 어디에서든지 TV를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만사를 제치고 그 프로그램을 보아야 했던 시대의 시청률은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너무 장황하게 드라마 <여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유는 아시다시피 ‘바보’ 때문입니다. 바보와 꽃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본격적인 이야기로 방향을 바꿔보겠습니다.

         

꽃 가운데도 ‘바보’도 있을까요?    

  

바보 꽃도 다 있어요? 궁금증을 자아내는 질문이지요? 그런데 실제로 꽃 이름에 바보가 들어간 것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바보여뀌’라는 꽃입니다. 필자가 이리저리 찾아보고 꽃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바보가 들어간 다른 꽃이 있는지 물어보았으나 아무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 풀꽃에만 바보라는 명칭이 붙은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혹시라도 다른 바보 꽃을 아시고 계신 독자가 계시면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이 풀꽃을 만난 것은 더운 여름날 아파트와의 거리를 만들기 위해 큰 길가에 인공으로 만든 수로에서 입니다. 물가에 핀 것도 있고, 아예 흐르는 물속에 피어서 물의 흐름에 따라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것들도 있었습니다. 처음엔 여뀌라고 생각하고 폰카로 사진을 찍었는데 찍고 나서 집에 와 사진을 자세히 보니 바보여뀌였습니다. 여뀌라는 풀꽃은 종류가 많습니다. 여뀌, 개여뀌, 꽃여뀌, 이삭여뀌, 털여뀌, 명아자여뀌, 흰명아주여뀌, 가시여뀌, 기생여뀌와 같은 여러 종류가 있고 구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바보여뀌는 여뀌랑 모습이 아주 비슷하게 생겼지만 맵지가 않고 꽃이 좀 성글게 피어 바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뀌는 매운 성질이 있어 짓이겨 물에 풀어놓아 잠시 기절한 틈을 타서 물에 둥둥 뜬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바보여뀌는 잎과 줄기가 맵지 않고 모양도 어수룩하게 생겼습니다. 여뀌와 모양이 비슷하게 생겼지만, 잎과 줄기를 씹어 보면 맵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잎에 검은 선점이 있어 구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 동네에서는 여뀌를 거의 볼 수가 없습니다. 열이면 아홉은 바보여뀌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매운맛이 없는 바보여뀌가 대부분인 여뀌란 이름을 가져야 하고, 매운맛이 있는 여뀌가 바보 아닌가, 둘의 이름과 처지가 혹 바뀐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세상도 혹시 이같이 바보라 불리는 사람들과 바보 아닌 사람들이 바뀐 것은 아닐까?’ 남을 보고 바보라고 놀려대는 비뚤어진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오히려 바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뀌든 바보여뀌든 꽃말이 ‘학업의 마침’, ‘수료’입니다. 찹 좋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졸업식이나 학위수여식에서 공부를 마친 사람들에게 이 꽃을 푸짐하게 원예 개량해서 꽃을 만들어 꽃다발을 해주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故 김수환 추기경


마지막으로 스스로 자기를 ‘바보’라고 하신 분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님입니다. 그는 자신이 ‘나는 바보입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잘난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어디 가서 안다고 나대고, 대접받길 바라는 게 바보라고 했습니다. 그분의 마지막 말씀이 아직도 가슴을 울립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제일 바보같이 산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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