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버려진 것들의 잠재력:'쓸모없음'을 '쓸모있음'으로..

두손갤러리, 김춘환 개인전 -Reassembled Silence

by 민경우

여러분들은 아날로그 감성을 좋아하시나요? 이를테면, 손끝에 느껴지는 종이의 질감이나 잉크가 번지는 흐릿한 감성 같은 거요. 손으로 무언가를 끈질기게 쌓고, 자르고, 매만지는 느린 노동은 사실 현실과 맞지 않아 서서히 자리를 잃어가는 추세인데요. 이런 현실과 맞지 않게 느린 노동으로 작품활동을 하시는 작가님이 있습니다. 바로 김춘환 작가님인데요. 최근 두손갤러리에서 김춘환 작가님의 개인전 <Reassembled Silence - 재조합된 침묵>이 제목과는 달리 성황리에 종료되었습니다. 작가님의 대표 작업인 'undercurrent' 연작을 포함해서 20여 점이 출품되었어요.


두손미술관 외관 전경. 출처. 두손미술관.


사실 제 글을 꾸준히 읽어보신 분들은 눈치챘을 수도 있겠지만, 원래 저는 전시가 마감되기 전에 전시리뷰를 작성하는데, 이번에는 이미 종료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리뷰를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 현대사회에 꼭 필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들을 출품해서 반드시 소개하고 싶었어요. 김춘환 작가님은 우리가 매일 마주하고 쉽게 버리는 인쇄물들, 광고지, 잡지 그리고 전단지 같은 일회성 매체들을 작업의 재료로 사용해서 작품을 만드십니다. 이번 전시의 핵심적인 부분이죠.


이번 개인전 전시서문의 글을 빌리자면, '끝없이 쏟아지는 이미지의 시대에 많은 정보의 소음 속에서 살아간다. 일상의 인쇄물들은 빠르게 소비되고 사라진다. 작가님은 버려진 파편들을 모아 붙이고, 구기고, 자르고, 쌓는다. 잔해들을 재조합하여 소음너머의 '침묵'을 시각화하는 행위이다. 작가님의 손끝에서 종이는 물감이 되고 절단은 붓질이 된다. 절단은 감춰진 내면의 결(undercurrent)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잘린 단면은 종이의 깊은 속살을 드러내고 그 안에는 시간의 주름과 기억의 지층이 겹겹이 쌓여있다. 표면 위에서 빛과 그림자는 부딪히고 사라지며, 반복된 손의 리듬 속에서 물질은 조용한 숨결을 얻는다.'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서문인데요. 예를 들면 바닷가에 파도가 치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거칠고 성난 파도는 현대사회의 무분별한 정보로 봤을 때, 파도의 단면을 자르고 나면 그제야 심연의 결(undercurrent) 즉, 정보의 본질을 알 수 있죠. 현대사회는 무분별하고 자극적인 정보에 치중하여 본질을 가립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이번 전시는 정보의 본질적인 깊이를 탐색하도록 작가님께서 묵직한 질문을 던진 게 아닌가 싶었어요.


<Reassembled Silence> 전시를 연 두손갤러리 전시전경. 전시 초입 부분. 출처 두손갤러리


갤러리 초입 부분을 지나서 가장 먼저 보이는 작품은 바로 <Undercurrent 171001>입니다. 멀리서 보면 파란색 물감으로 그린 추상회화 같지만, 종이를 접어서 만들어낸 작품이죠. 접힌 종이들을 보면서 응축된 느낌을 받았는데요. 시끄러운 정보들의 소음들을 종이로 침묵시킨 듯 보였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종이 파편들이 캔버스 위에서 푸른색의 강력한 패턴으로 재조합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제 눈에는 화살표 패턴처럼 보였습니다. 역동성 있게 반복되는 패턴과 화살표의 엣지있는 모습이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미니멀리즘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특히 작품의 색감은 제목과 연관해서 봤을 때 파도의 단면을 자른 바다의 심해를 연상하게 만들었죠. 사실 작가님이 왜 푸른색계열을 사용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시끄러운 정보의 파편들이 깊은 물속에서 정화되어 고요함과 응축된 에너지를 관객들에게 선사하는 듯 보였습니다. 읽고 버려진 쓰레기에서 깊은 바다를 느꼈다는 게 신기했고 계절을 생각해 보면, 여름보다는 겨울바다가 좀 더 가깝지 않을까 하는 것도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은 결국 소비되고 사라지는 시대의 잔해를 작가님의 손에서 숨겨진 시간과 물성의 깊이를 탐색하는 작품이었습니다.


<Undercurrent 171001>, 150cm x 200cm, Paper on Canvas, 2017, 출처. 두손갤러리.




<Reassembled Silence> 전시를 연 두손갤러리 전시전경. 출처 두손갤러리


다음으로 두 개의 작품을 한꺼번에 소개할 까 합니다. 바로 <What's now I>와 <Somewhere before 250806>입니다. 이 작품들은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작품들을 만들고 남은 부분들로 스테인리스와 함께 제작한 작품인데요. 작품들을 보면서 재활용을 넘어서 업사이클링(Upcycling)의 극한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반적으로 작가님의 작품은 버려진 잡지나 인쇄물로 만들어졌는데, 거기에서 또 버려진 쓰레기로 작품을 만들었으니 너무 놀라웠는데요. 작품의도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작가님이 환경윤리를 생각하는 마음은 확실히 느꼈습니다.


<Somewhere before 250806>는 이번전시에서 유일하게 관객참여형 작품입니다. 둥근 도시락통에 작품을 만들고 버려진 종이를 넣어 만든 작품인데요. 자석의 원리를 활용하여 위치를 마음껏 바꿀 수 있습니다. 위치를 여기저기 옮기면서 재밌게 감상했던 작품인데요. 이 두 작품을 보면서 다른 작품들을 만들고 남은 부산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작가님의 작업실 내에서 재료가 쓰레기 -> 재료 -> 작품 -> 또 다른 쓰레기 -> 최종 작품의 재료.라는 일종의 '순환'이 떠올랐어요. 자원 낭비가 필연적인 예술 생산 과정에 대한 작가님의 환경적 책임감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라서 인상 깊었습니다.


<What's new I>, Stainless and Paper(위), <Somewhere before 250806>, Paper on stainless(아래)




<Reassembled Silence> 전시를 연 두손갤러리 전시전경. 출처 두손갤러리.


두 번째 공간을 넘어가면 좌, 우 벽에 종이로 만든 대작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인 <Giant Step I>를 먼저 소개할게요. 작품이 나무패널을 사용해서 그런지 <Undercurrent> 연작들과는 다른 접근을 보여주고 있죠. 이 작품은 종이를 말아접은 방식인데요. 접힌 종이들은 '거대한 압축'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전에 보았던 <Undercurrent 171001>의 푸른색 계열과 무언가 통제된 패턴과 달리, 수많은 잡지와 광고, 인쇄물의 원색이 그대로 드러나 날것의 표현으로 보이는데요. 스케일과 밀도가 확장된 만큼 야생적인 에너지가 느껴졌습니다.


사실 작품의 제목에 비추어 보면 거대한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나타난 발자국 같은데, '과잉 소비'라는 괴물의 발자국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이 발자국을 박제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나무패널을 사용한 것이 작가의 의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전시 서문에 적혀있던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일상의 인쇄물들은 정보의 흐름 속에서 빠르게 소비되고 사라진다.'인데요. 작품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불규칙적으로 빠르게 소비되는 과정에서 결국 폭발하는 모습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았습니다. 이를 테면, 정보의 폭발적인 공급속도가 인간의 인지 처리 능력을 아득히 초월하면서 생긴 현상을 작품에서 보여준 것이죠. 늘 그랬듯 제 방식대로 해석해 보았는데요. 어쨌든 이 작품에서 느껴지는 건 감당할 수 없는 정보의 소비와 속도를 잘 표현했다고 보입니다.


<Giant Step I>, 240cm x 300cm, Paper on a wooden panel, 2014, 출처. 두손갤러리.


이제는 나무패널 위에 작품을 만든 또 하나의 작품을 소개할게요. 이전 작품과는 달리 날카로운 느낌이 있어요. 그 이유는 작품 위의 단면을 절단한 흔적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 대해 여러 가지 조사해 본 결과, 작가의 초기 작업 방식을 보여주는 작품이고 <Giant Step>이나 <Undercurrent> 연작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으로서 김춘환 작가님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작품이라고 전하는데요. 종이의 단면을 절단함으로써 작가님의 의도가 다분히 보였습니다. 작품의 제목은 <A la mode>, 프랑스어로 되어있어요. 해석하면 '최신 유행의', '현재 유행하는' 뜻입니다. 작가님은 유행을 따르는 패션지나 광고지를 사용해 작품을 만든 후, 나무 패널 안에 가두어 빠르게 사라질 유행들을 보관하고 있죠.


<Giant Step> 덕분에 비교해서 감상하기가 좋았는데요. 우선 다채로웠던 표면의 색이 절단이라는 행위로 인하여 작품이 중성적인 색채를 띄게 되었죠. 화려하고 자극적인 유행의 허울 즉, 껍데기를 날카롭게 도려내는 행위를 통해 그 안에 남아 있는 물질의 근원적인 민낯과 시대의 본질을 찾으려는 작가님의 시도가 너무 인상 깊었습니다. 결국 유행 따라 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려 본인이 정작 가져야 하는 진정성이나 실력은 등한시되고 도태되는 걸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게 아닌가 싶었어요.




*이 작품은 글을 쓰는 저로서는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요. 요즘 트렌드가 숏츠영상, 그리고 요약본 위주로 가는 추세인데, '그럼에도 긴 글을 고집하는 내가 맞을까?'에 대한 고민을 브런치 작가가 된 후 정말 많이 했는데요. 물론 아쉽게도 작품을 보고도 정답은 못 찾았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형태의 콘텐츠든 진정성이 중요한 거 같아요. 내용에 진정성만 있다면, 글이 짧든, 길든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받지 않을까 싶은데요. 사람의 마음을 얻는 글... 정말 어려운 거 같네요. 전시리뷰를 쓰다가 뜬금없을 수 있지만, 앞으로 어려운 예술을 진정성 있고 재밌게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A la mode>, 240cm x 300cm, Paper on a wooden panel, 2004, 출처. 두손갤러리.




<Reassembled Silence> 전시를 연 두손갤러리 전시전경. 출처 두손갤러리.


이번 전시에서 가장 색이 많고 다채로운 작품을 하나 소개할게요. 형형색색의 종이들을 구기고 접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작품 제목은 <What's new II 250902>입니다. 이 작품은 작가님께서 파리에서 체류하는 동안 만들어진 작품인데요. 포인트는 바로 패션 매거진 표지를 주재료로 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전 작품들과는 다른 차별성을 띄는데요. 특히 빨강, 노랑, 분홍, 파랑 등 채도 높은 원색들을 사용함으로써 시각적으로 강렬하고 자극적인 느낌을 줍니다. 뭐랄까... 저는 이것을 '유행의 카오스'라고 표현하고 싶은데요. 예를 들면,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자극적인 요소들을 사용합니다. 이 요소들이 강렬한 원색이라고 하면 질서 없는 패턴들은 요즘 쏟아져 나오는 SNS 광고들의 패턴이라고 볼 수 있죠. 적나라하게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여겨집니다.


종이를 촘촘히 넣지 않고, 마치 풍선에 바람 빠진 듯 구겨서 작업을 했는데요. 이는 유행이 지닌 가벼움과 허무함을 보여주는 메시지입니다. 가장 비싼 브랜드의 로고와 이미지를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보이는 건 무질서하게 쌓인 형형색색의 돌무더기나 폐기물처럼 보이죠. 유행의 화려함 겉모습과 그 뒤의 공허함이 대조되는 작품입니다.


작품 제목은 <What's new>, 작가는 패션 산업의 슬로건에 대해 새로운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듯 보이지만, '새로운 것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최종 결과물은 이처럼 구겨진 채 쌓인 쓰레기 더미'라고 외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What's new II>, 100cm x 100cm, Paper on a panel, aluminum, 2025, 출처. 두손갤러리.


마지막으로 하나 더 소개할 작품은 <Undercurrent 250905>입니다. 얼핏 봤을 때 평면회화처럼 보이는데, 역시 인쇄된 종이로 이루어진 작품이었어요. 작품을 봤을 때, 첫인상은 창밖으로 굵은 비가 내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인간의 군상을 담은 작품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역삼동 퇴근길'을 연상하게 만들었죠. 흑백 텍스트로 이루어진 종이로 완성한 작품이라 절제된 느낌도 있어서 세련되어 보였습니다.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최대한 평평한 상태를 유지하며 겹쳐 쌓거나 붙인 흔적이 있습니다. 평평한 상태를 유지하는 이유는 다른 작품들을 만들 때, 바닥에 눌려있던 밑동 부분이에요. 제목과 연관 지어 작품을 보면 그 어떤 Undercurrent 시리즈 작품보다 더 아래의 깊은 작품인 거 같아요. Undercurrent 뜻 자체가 '저류', '심층'이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밑동 부분을 전복하여 완성한 작품이니 심해보다 더 깊고 빛이 들어오지 않는 심연인 셈이죠. 작가님은 이번 전시에서 '내면의 결은 시간의 주름과 기억의 지층이 겹겹이 쌓여있다.'라고 하셨는데, 어쩌면 이 작품이 김춘환 개인전 <Reassembled Silence - 재조합된 침묵>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이라고 여겨집니다.


이 작품에서 작가님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침묵'입니다. 화려한 색채와 이미지가 밑동 부분의 바닥면에 가려지면서 작품은 고요하고 차분한 명상의 상태에 이릅니다. 모든 소음이 압축된 후 남은 고요함을 의미하죠. 하지만 저는 이 작품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알게 되면서 '무게감'이 느껴졌는데요. 수많은 종이 조각들을 겹겹이 쌓아 올려 상층부의 무게를 견뎌냈습니다. 모든 시간을 견딘 인내는 피상적인 유행의 가벼움에 맞서 진정성이라는 무게를 추구하는 작가님의 철학이 느껴졌죠.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지탱하는 것이 아닐까요?


<Undercurrent 250905>, 117cm x 81cm, Paper on Canvas, 2025, 출처. 두손갤러리.


예술에 대한 정의는 시대와 관점에 따라 다양하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정의는 모순적이지만 '쓸모없음'을 '쓸모있음'으로 증명하는 작업이라는 작업이야말로 예술의 가장 근원적인 기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가치 = 경제적 효용성>이라는 좁은 잣대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경제적 효용성이 없는 대상은 없애야 한다는 세상을 살고 있죠.


김춘환 작가님은 작품을 통해 이러한 정신에 정면으로 저항합니다. 인쇄물, 광고지등 일회성 매체들을 주재료로 사용하고 단순한 재활용을 넘어섰죠. 가장 낮은 가치(쓰레기)를 가장 높은 가치(순수 예술)로 격상시킨 연금술적 시도를 했습니다. 바로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미학적 오브제로 재탄생시킨 거죠. 이러한 모순적인 작업을 '굳이' 해내는 작가야말로 예술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반 대중이 예술가를 존경까지는 할 필요는 없지만, 존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Kim Chunhwan, Courtesy of Duson Gallery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