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마르크스는 '인간은 그의 존재로 증명되지 않는다. 그가 생산해 내는 것으로 증명된다.'라고 했다. 그냥 살아있다고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무언가 세상에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래야 존재가 성립할 수 있다. 존재의 정의를 그렇게 내린다면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나는 어떤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는가'로 바꿀 수 있다. 나는 세상에다 무엇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배설물 이외에 나는 무엇을 생산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40년 넘게 적지 않은 삶을 살아왔지만 딱히 생각나지 않는다. 꾸준히 직장을 다니며 일을 하고 있으니 무언가 생산해 낸 것은 많겠지만 와닿지는 않는다. 회사가 생산하는 제품을 누가 사는지 모른다. 내가 알 수 있는 건 오직 보고서에 올리는 숫자뿐이다. 무언가를 하는데 그것도 매일 열심히 하는데 보는 거라곤 숫자뿐이니 허무했다. 문득 나는 어떤 존재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글도 쓰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가 얼마나 나를 방치해 왔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나에게 가장 큰 이방인이었다.
낯선 이와는 공감을 할 수 없다. 불편하고 성가시다. 나의 모든 경험, 감정을 그렇게 느껴왔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내 것이 아니었다. 불편한 누군가와 함께 하는 듯 늘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제야 알게 됐다. 나의 인생이 왜 그토록 두려웠는지.
나를 늘 불안하게 했던 내 안의 괴물과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다. 용을 물리치고 공주를 구하러 나서는 기사의 마음이었다. 그 괴물만 처치하면 나는 비로소 행복해지리라 믿었다. 고통에서 벗어나고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내면으로 모험을 떠났다. 드디어 높고 두꺼운 벽으로 둘러싸인 요새를 발견했다. 맹렬한 기세로 뛰쳐 들어갔다. 그 안에는아이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다.
기억상실증 환자가 충격으로 주마등처럼 기억이 돌아오듯 그 아이가 왜 거기 있는지 기억이 났다. 꽤 오래전부터 그곳에 유기해 놓고 있었다. 빛 한줄기 들지 않는 곳에서 그 오랜 시간 버려두었다. 자기 좀 봐달라고 그렇게 부르짖었음에도 난 지독히 모른 척했다. 그 울음소리가 진절머리 나게 싫었다. 뭘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몰라 절망스러웠다. 그 아이는 나의 고통이었다.
내 안에 물리쳐 이길 괴물 따위는 없었다. 나의 두려움과 좌절이 만들어 낸 허상일 뿐이었다. 내면을 직시하니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명확해졌다.
'내가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주기.'
그때부터 '나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무작정 했던 읽기와 쓰기에 목적이 생겼다. 모든 지적 활동은 나를 알기 위해 행해졌다. 나와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친해지기 위해 뇌과학과 심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내가 얼마나 나를 오해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고 어떻게 바로 잡을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직접 몸으로 실천해 보았다. 수많은 자기 계발서에서 하라는 방법보다 빠르게 효과를 보았다.
비로소 나는 내가 생산해 내는 무엇이 되려고 한다. 내가 읽고 쓰며 이 거지 같은 세상을 살아갈 명분을 찾았듯 나처럼 불안과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나 같은 사람도 있다고 위로해주고 싶다.내가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보여주고 싶다. 그래서 내가 나를 찾아 내면을 탐구하고 기록한 '나 공부'의 결과물을 책상 서랍에서 꺼내와 세상에 내놓기로 마음먹었다. 나만의 노트가 아니라 많은 이와 공유할 수 있는 곳에 올리기로 했다.
글은 나를 깨부순 망치다. 나를 꾸짖는 선생이다. 나를 위로하는 엄마품이다. 내가 삼키고 토해낸 글이 나를 구원했다. 온전히 내가 창조한 글도 누군가에게 그러할 수 있다면 나는 비로소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법은 타인을 행복하게 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진부한 말이 진리임을 알게 됐다. 내가 내놓은 글로 누군가가 나아진다면 분명 그 영향은 돌고 돌아 나에게 오리라. 내가 존경하는 작가가 그랬듯 좋아하는 뮤지션이 그랬듯 나에게 수많은 영감을 준 이들이 그랬듯. 그래서 내가 굳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냈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