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옛날옛적 어느 먼 나라에 어질고 자비로운 왕과 왕비가 있었다. 백성에게 칭송받고 주변국들로부터 인정받는 그들에게도 아픔이 있었으니, 바로 아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늘도 이들의 선함과 자녀에 대한 간절한 소망에 감복한 것인지 어여쁜 공주를 보내준다. 이 아이가 그 유명한 잠자는 숲속의 공주 '오로라'다.
나라 전체가 성대한 축제를 열었다. 모든 사람이 초대받아 흥겹게 어우려져 소중한 공주의 탄생을 축하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가장 강력하고 사악한 마녀인 말레피센트만은 초대받지 못하였다. 삐질대로 삐진 마녀는 축제에 와서 깽판을 치고 저주까지 내려버린다. 그 아이는 16세가 되는 생일날 물레에 손가락을 찔려 죽게될 것이라고. 남의 잔치에 이런 깽판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다행히 이쪽에도 능력자는 있었다. 그래야 어느 정도라도 밸런스가 맞아서 이야기가 진행될테니. 착한 요정이 그 무서운 저주를 다 없애주진 못해도 죽는것 대신 영원히 잠드는 걸로 퉁쳐준것이다. 이러나 저러나 그게 그거 같긴 하지만 부모 입장에선 목숨이 붙어 있기만 해도 다행이었다.
부모는 아이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한다. 아니 온 나라가 이 왕족의 후예를 지키기 위해 대동단결 한다. 나라 안의 모든 물레는 다 불태워 버리고 아이는 절대 성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으며 철통같이 경계를 섰다. 소녀는 16세 생일이 되던 날, 그녀를 지키던 어른들은 마녀의 저주를 피했다는 섣부른 승리감에 취해 너무 빨리 정신줄을 놔버렸다. 그런 어른들을 뒤로 하고 그동안 방안에만 갖혀있었던 시간을 보상받으려는 듯 성안을 구석구석 누비고 다니다 제일 구석지고 어두컴컴한 방 한켠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물레를 발견한다. 호기심에 만져보다 결국 손을 찔리고 영원한 잠에 빠지고 만다.
대략 여기까지가 누구나 다 아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 이야기다. 이후 이야기는 전형적인 동화 스토리다. 멋진 왕자가 마녀가 곳곳에 파놓은 온갖 역경과 고난을 헤치고 결국 마녀를 없애고 공주를 진정한 사랑의 입맞춤으로 깨워냈다. 그리하여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모름지기 동화는 happily ever after가 대미를 장식해야 동화다. 중간에 왕자가 죽는 이야기는 없을까 하는 마음에 많은 동화를 검색해 보았지만 그런건 없었다. 모두 그 이후로 행복했다.
그런데...
정말로 왕자는 오로라 공주는 행복했을까? 나도 이제 세상의 쓴맛이 뭔지 혀끝이라도 담궈봤고 뒷통수 쎄게 맞아가며 배운 이놈에 세상에 때가 타다 보니 저런 삐딱한 생각이 든다. 진짜 둘이 행복했을까?
극악무도한 말레피센트는 살면서 반드시 겪을수 밖에 없는 세상의 어두운 면이다. 사실 흑마법을 쓴다는 것만 제외하고는 지금 우리네 인간들과 크게 다를바가 없다.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남의 고통을 즐기는 그런 악한 모습이 강하건 약하건 우리 안에 모두 내재되어 있음은 자신 스스로가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모든 어둡고 악한 면을 모아 액기스로 짜낸 것이 말레피센트라는 캐릭터다.
왕과 왕비는 모든 사람들을 초대 했지만 어둠의 결정체인 말레피센트는 부르지 않았다. 부모라면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말레피센트는 살면서 평생 도망쳐야 할 존재가 아니라 수도 없이 맞딱뜨릴 수 밖에 없는 '현실'인것이다. 아무리 피하고 도망쳐도 결코 그 손아귀에서 벗어날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말레피센트를 인정하고 바로 마주할 준비를 한다. 사회화라는 과정을 거쳐서 말이다.
하지만 오로라는 그런 사회화의 과정을 거칠수가 없었다. 그것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준비시켜야 할
부모가 차단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부모의 과잉보호로 오로라는 세상물정 모르는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한 아이로 자라게 된다.
그런 아이가 속박이 느슨해진 틈을 타 혼자 돌아다니다 물레를 마주하게 된다. 온 나라의 물레란 물레는
다가져다 태웠는데 크면서 그걸 볼 일이나 있었겠는가. 발이 땅에 닿을 틈도 없이 애지중지 자라온 아이에게 물레는 얼마나 신기했을까.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들었다. 왜 하필 물레였을까? 부엌에 칼도 있고 뾰족한 펜도 있을텐데 왜 하필 물레에 찔려 죽는다고 했을까?
왜 공주를 죽게하는 물건이 물레였는지 작가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간디의 사상을 통해 생각을 해봤다. 물레는 간디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위한 국민의 계몽에 사용했다고 한다. 간디가 생각한 진정한 독립은 단순히 나라의 자치권을 인정받는게 아니었다. 외세로부터 진정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자급자족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스스로 일어설 수 있어야 그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가 찾아온다고 믿었다. 물레는 나를 스스로 일으키는 자립이자 내 삶에 대한 책임, 그리고 타인을 위해 이로움을 창조하는 이타심의 메타포다. 진정한 자유는 이들로부터 비롯된다고 간디는 믿었다.
하지만 오로라는 처음 맞딱뜨린 이 막중한 책임의 중압감에 못이겨 스스로를 유년의 세계에 유배시켜 버린다. 한번도 자신과 남을 위해 살아본 적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배워본 적도 없는 이 가엾은 소녀에게 현실이란 깨어나고 싶지 않은 악몽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보고 싶지 않은 현실에서 유리시키고 속 편히 자고 있는 와중에 용감한 왕자는 죽을 고비를 넘기며 공주에게 왔다. 그 험난한 고난과 역경은 앞으로 다가올 그의 미래를 위한 예방주사에 지나지 않았다. 스스로 자유를 쟁취할 능력이 없는 공주는 타인의 자유를 흡혈해야만 한다. 왕자가 깨운 것은 평생 본인의 피를 바쳐야 하는 흡혈마녀였다.
주변에 '어른아이'같은 사람을 두었던 경험이 있으면 알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성가시고 짜증나는 존재인지. 절대 만족할 줄 모르고 늘 원하고 또 원하지만 그들이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주변인을 짜증나게 해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는 아이와 별 다를바 없는 정신상태로 살아간다. 아이는 귀엽고 이쁘기라도 하지 다 큰것들이 그러고 있는 것만큼 세상에서 보기 싫은 것도 없다.
그런데 왕자와 공주가 행복하게 살았다라. 의문이 들수밖에 없다. 솔직히 공주가 나중에라도 정상적인 성인으로 성장했으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지금도 주변에 나를 포함한 수 많은 어른아이들을 보면서 그들은 성장할 기회가 없어서 아직까지 저러고 있는 것일까 의문을 가져보기도 했지만 나를 비추어 봤을때 대답은 '아니다' 였다. 언제까지 운이 없어서, 기회가 없어서, 뭐가 안되서, 뭐가 없어서 안된다고 외부 환경 탓만 하고 있다. 그런 정신머리에 무슨 운이 따를 것이며 기회가 온들 그게 기회인 줄이나 알아보겠는가.
나도 마음 한편으론 왕자와 공주가 행복하게 살았길 빈다. 그래야 나같은 어른아이도 누군가가 짠하고 나타나 손하나 까딱 안하고 평생 아이처럼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을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산다고 행복할까. 그것도 그럴것 같지는 않다. 점점 더 불평불만만 많아지고 남아도는 시간에 온갖 망상이나 해대다 결국 허무주의와 염세주의에 빠져 스스로 불행하다 여기며 세상 탓만 하고 있을테니.
생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행복은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정복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어렸을때는 꽤나 제국주의적인 발상이구나 했는데 나이를 먹고 세상을 살아보니 그 말이 맞는것 같다. 가만히 앉아있는다고 행복은 백마탄 왕자처럼 온갖 역경을 헤치고 나를 구하러 오지 않는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서 가장 행복했을 사람은 바로 공주를 구하러 가는 왕자였을 것이다.
그는 목표가 뚜렷했고 그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하나하나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점점 더 커지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 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이다. 그는 도망치거나 회피하지 않았고 똑바로 바라봤다. 이기기 위해 몸을 던졌다. 오늘날 많은 뇌과학자와 심리학자가 말하는 행복의 조건이다. 현재가 불만족스럽고 행복하지 않다면 공주보다는 말레피센트에 대적한 왕자를 보라. 그가 바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롤모델이니.
왕자는 말이 아니라 온 몸으로 보여준다.
진정한 행복은 회피가 아니라 기꺼이 받아들이는 용기에서 시작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