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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ware of Awareness Apr 26. 2024

귀납적 인생 살기

진짜 삶의 시작은 내 진심으로부터

우리는 연역적 사고에 익숙하다. 사회구조가 그렇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직장에 이르기까지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에 맞춰 세부적인 계획이 세워진다. 큰 것부터 시작하여 작은 것으로 향하는 방향성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사고방식이다. 문제는 자신만의 기질과 흥미, 적성과 상관없이 부모나 상사 등 타자나 외부로부터 큰 목표를 부과받는 현실이다. 


이제는 유튜브나 자기 계발 도서들 조차 월 천만 원을 못 벌면 무능력자, 패배자, 인생의 방관자 취급을 하는 시대에 이르렀다. 자신이 그렇게 큰 그릇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게 된 후에도 큰 사람, 큰 목표라는 무게에 짓눌려 산다. 그러다 보니 자존감은 바닥이고 자신감은 부서진 지 오래다. 자기 효능감과 자기 믿음이 없으니 자존심만 가시처럼 뾰족해진다. 그렇게 자격지심과 피해의식으로 남들을 찔러대다 결국 그 가시의 끝은 자신을 향한다. 

 

연역적인 삶의 태도와 사고방식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그 자체로서 나쁘다기보다 너무 그쪽으로만 쏠려있어 문제다. 대단한 것, 위대한 것에만 초점을 맞추니 우리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작은 일과 그 일을 묵묵히 하는 보통 사람들이 소외된다. 나 조차도 성공을 거두지 못한 나 자신을 내 인생의 이방인으로 만들어 버리니 인생은 늘 고통과 고독의 연속이고 지옥이 되어 버린다. 내 삶에 나는 없다. 


나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기준은 모두 외부에 있다. 성적, 생활기록부, 인사고과, 성과평가 등 그 안에는 주어진 목표에 도달할 가능성을 판단하는 기준만 있을 뿐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는 없다. 나의 성과와 타인의 성과를 끊임없이 비교하고 뛰어난 자에게는 굴종을 느끼고 모자란 자에게는 우월감을 느낀다. 이런 사고방식이 너무나 당연하게 자리 잡아 나 조차도 나 자신을 평가할 때 이런 기준을 들이대면서 문제의식을 갖지 못한다. 삶은 늘 불안하고 공허한데 이유를 알 수 없는 이유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 아니 최소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가장 시급한 일은 잃어버린 나를 찾는 일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인식하고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간 개념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동물과 다르다. 자의식과 인지능력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이성’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다. 본능이나 타인이 주도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디자인하고 실행하는 삶이 인간다운 삶이다. 외부와 타인의 강요가 아닌 자신의 진심에서 비롯된 삶. 내가 살고자 하는 삶의 방식을 귀납적 삶이라 부른다.


나도 직접 경험을 하기 전에는 이런 식의 '내가 나를 돌봐야 한다'는 자기 계발은 허튼소리로 치부하는 것을 넘어 혐오까지 했었다. 아무리 해도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었다. 행복하고 자기만족적인 삶을 위해 해야 할 바를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허나 앎이 실행으로 옮겨지지 않았다. 앎과 생활의 괴리가 커질수록 일상의 질은 떨어졌다. 회사에서 무슨 일 있냐는 말을 듣는 횟수가 늘어나고 실적은 떨어졌다. 가족, 친구와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악순환으로 심각한 공황장애와 불안장애를 앓았다.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 정도까지 되니 약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약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약이 떨어져 가는데 바빠서 병원을 못 가면 불안했다. 약이 없으면 잠들지 못했다. 나중에는 약으로도 공황증세를 억누를 수 없었다. 어딜 가던 무얼 하던 약에 끌려 다니기도 힘들었다. 나의 힘으로 극복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지 않으면 스스로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두려웠다. 그래서 "나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공황증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의 진심을 찾기 위한 여러 방황 끝에 뇌과학과 심리학에서 그 길을 찾았다. 수많은 자기 계발서에서 하라는 대로 해봐도 끝내 메워지지 않았던 공허함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내가 나를 모르는 상태에서는 좋은 방법이라도 밑 빠진 독에 물 붇기 마냥 무의미한 짓이다. 아무리 크게 긍정적인 자기 확언을 100번을 외쳐도 끝내 현타가 오는 이유는 과연 이것이 진심인가 하는 의문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진심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나조차 모른다. 변수로 가득 찬 세상에서 유일한 상수인 나 자신을 알지 못하니 삶은 늘 방황이고 고통이다. 내가 나와 맺는 관계의 깊이와 비례하여 세상은 살만해진다. 


나도 처음에는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 많이 방황했다. 실패도 하고 되지 않아 좌절도 겪었다. 그러면서 명상(알아차림), 읽기, 쓰기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지 찾아냈다. 자기 자신이 가장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고 진정으로 존중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언제나 외부로만 향해 있던 주의와 관심을 나에게 돌려야 한다. 연역적 사고에서 귀납적 사고로 전환이 되면 비로소 앎이 실행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내가 변한다는 말은 내 행동이 달라지고 그 행동이 진심이라는 뜻이다.


귀납적 삶은 나에게서 가장 가까운 데부터 시작한다. 바로 나로부터 시작하는 삶이다. 귀납적 삶의 주체는 "나"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비롯된다. 내 감정, 내 의지, 내 생각에 충실한 삶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원대한 목표나 거창한 결과가 절대 아니다. 이기적인 마음도 결코 아니다. 작고 소소한 일들을 매일 꾸준히 반복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진심으로 대할 수 있게 되면 그때야 비로소 타인에게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나를 알게 되면 세상의 많은 의문이 풀린다. 그러다 보면 내가 나를 발견하게 되고 그토록 찾아 방황하던 인생길이 자연스럽게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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