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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ware of Awareness Apr 29. 2024

진실은 사실 안에서 유실된다.

사실이 진실이라는 착각

한 방에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너무 덥다고 한다. 다른 사람은 너무 춥다고 한다. 덥다고 한 사람은 얼굴이 벌게져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춥다고 한 사람은 입술까지 파랗게 질려 덜덜 떨고 있다. 그럼 이 중에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없다. 두 사람 모두 사실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진실은 그 방은 온도 25도에 습도 50%라는 수치다. 지만 하나의 진실에 두 사실은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서로 대척점에 있음에도 거짓은 없다.


사실은 사유화된 실재다. 진실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합리화를 한다. 자극과 느낌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의미를 부여한다. 이때 의미부여는 자신을 보호하는 쪽으로 하게 된다. 인간은 불쾌감을 느끼면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 한다. 통증을 느끼면 병원에 가고 배고프면 밥을 먹는다. 스스로 최적의 상태를 설정해 두고 거기서 벗어나는 몸의 현상을 바로 잡으려 한다.


심리적으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인지부조화가 대표적인 예다. 감정과 언행이 일치하지 않을 때 불쾌함을 느낀다. 그래서 생각이 신념을 행동에 맞춘다. 이를 잘 보여주는 실험이 있다.


1. 60명을 20명씩 세 그룹으로 나눈다. 모든 집단에 무의미하고 지루한 반복작업을 1시간가량 수행시킨다.

2. 이후 두 그룹 피험자에게 실험 안내자가 사고가 났으니 대신하여 다음 실험 참가자에게 이 작업은 재밌다고 말해달라 요청한다. 그리고 보수를 약속한다.(일부는 1달러, 나머지는 20달러다. 서로 얼마를 받는지 모른다.)

3. 이 제안을 수락한 일부 피험자는 다음 실험 참가자에게 무의미하고 지루한 반복작업이 재밌다고 소개한다.

4. 안내를 마친 피험자에게 보수를 지급한다.

5. 보수를 받은 피험자에게 1번의 단순 반복작업이 진짜 재밌었느냐고 묻는다.

6. 1달러를 받은 집단은 그 작업이 가치 있고 재미있었다고 했다.

7. 실험자가 그 작업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고 말해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런 일이 바보 같다고 느껴지는가. 우리에게 매일 일어나는 일이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회사에서 이런 일이 매일 일어난다. 크던 작던 갈등을 겪는 이유는 각자 진실을 사유화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의 문제는 실재 혹은 진실이 사유화되면서 발생한다.


자극에 대한 반응은 자판기처럼 값이 주어지면 자동으로 나온다. 이 즉시적으로 인출되는 행동을 '습관', '성격'이라고 한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나온 이 자동반응을 나중에 합리화한다. '선 생각 후 행동'이 아니라 자동적으로 인출되는 행동을 해버리고 나중에 생각을 그에 맞춘다. 그 합리화 패턴은 보통 남 탓, 상황 탓, 환경 탓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현실과 합리화의 간극의 크기에 불행도 비례한다.


자극에 대한 반응은 자판기처럼 값이 주어지면 자동으로 나온다. 이 즉시적으로 인출되는 행동을 '습관', '성격'이라고 한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나온 이 자동반응을 나중에 합리화한다. '선 생각 후 행동'이 아니라 자동적으로 인출되는 행동을 해버리고 나중에 생각을 그에 맞춘다. 그 합리화 패턴은 보통 남 탓, 상황 탓, 환경 탓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현실과 합리화의 간극의 크기에 불행도 비례한다.


진실이 사유화되는 순간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생각이나 감정으로 변한다. 객관성이 사라지고 진실성이 희박해진다. '과연 이렇게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맞나'라는 의심을 품으면 고통스럽다. 고통을 차단하기 위해 일어난 합리화가 고통을 증폭시킨다.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의 인식과 사고방식이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불행한 이유는 남이나 환경 때문이 아니라 내 안에서 상황을 받아들이는 나의 해석방식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자기를 다스린다는 말은 내면이 해석하는 방식을 바꾼다는 뜻이다.  나를 바꾸기 위해서는 평생에 걸쳐 구축된 단단한 해석틀을 부셔야 한다.


분노, 억울함, 질투 같이 부정적인 감정은 내가 더 발전할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신호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진실이 아님을 스스로 알아차리면 내적 해석의 방식을 바꿀 수 있다. 기계적인 반응에서 벗어나 내가 옳다고 믿는 행동을 진심으로 할 수 있게 된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은 행복의 근원이다.  


인생의 고통은 고난과 역경이 주지 않는다. 나를 괴롭게 하는 범인은 타인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자신의 자아다. 내가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는 말은 식상하다 못해 신물이 난다. 그럼에도 이보다 더 맞는 표현을 찾지 못했다. 내가 나를 알고 내면 해석의 틀을 바꾸니 정말 세상이 생각보다 살만해졌다. 적어도 예전처럼 불안하고 무섭지 않다. 까다로운 고객을 대할 때도, 소시오패스 같은 직장상사에게 시달릴 때도, 하는 말마다 꼬투리 잡고 틱틱 거리는 배우자의 태도에도 여유가 생기고 수월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알아차림', 바로 명상이다. 사실과 진실을 구분하려면 거리를 두고 바라봐야 한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진실이 아님을 인식하기 위해서도 거리가 필요하다.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한걸음 떨어져 그저 바라보는 행위가 알아차림이다. 이를 통해 내가 믿어왔던 진실이 실재가 아니라 내가 만들어 낸 해석임을 깨달을 수 있다. 불변의 진실에서 내가 깨부술 수 있는 허상이 된다.


물론 짧은 수행으로 그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 체력이 약한 사람이 운동 며칠 했다고 갑자기 건강해지거나 체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는 경우는 없다. 마음도 똑같다. 몸 운동과 다를 바가 없다. 하루 이틀로는 효과를 볼 수 없다. 매일 조금이라도 꾸준히 수행하다 보면 어느샌가 이쯤 되면 짜증을 내거나 포기했을 일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포기하지만 않으면 변화는 반드시 온다. 조금씩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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