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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ch Nov 13. 2023

내가 기러기 엄마라니!

속에서 천불이 나고, 입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지만 눈 질끈 감고 심호흡!

"얘들아! 세면대에 치약 좀 그만 묻혀! 우물우물 퉤 할 때 물은 살살 뱉어야 밖으로 안 튀지"

"거울에 손자국은 누가 자꾸 내는 거니"

"너네 자꾸 창문에 얼굴도장 찍어놓을 거야?"

"거실에 꺼내놓은 물건 각자 자기 방으로! 얘들아 물건은 쓰고 제자리에 두라고!"

"빨래통에 옷 넣기 전에 주머니에 있는 물건들 다 빼, 지난번에 목걸이가 들어가서 세탁기 고장 날뻔했어!"

"밤에 손톱 깎지 말고 아침에 깎자"

"밥 먹을 때 많은 이야기를 하면 밥풀이 튀잖니. 입에 있는 음식은 다 씹고 얘기하자!"

"달콤한 간식을 많이 먹는 건 좋지 않아. sugar high로 머리가 아플 수 있거든"

"Play date 허락해 줄 테니 약속한 시간에 맞춰서 집에 들어와라"


나는 아침부터 잘 때까지 무수히 많은 잔소리로 아이들의 행동교정을 바라고 있다. 내가 아이들에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을 해도 잠시뿐 내일이 되면 또 같은 소리를 반복한다.


나는 아이들의 바르지 못한 행동에 관한 교정이라 말하지만 아이들은 엄마가 사사건건 잔소리를 끝도 없이 내뱉는다 생각한다. 우리들의 간극은 어찌 보면 내가 기러기 애미가 되어서 더 증폭된 것일 수도 있다.


남편이 없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차로 9시간이 걸리는 곳으로 남편이 이직을 했다. 워낙에 먼 곳이기에 이사와  전학은 당연하지만 중학생 딸과 초등학교 고학년인 아들이 현 학교에서 학기를 끝내고 싶다고 똑 부러지게 말하니 아이들의 의견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기러기 애미 애비가 되었다.







남매가 아침에 등교준비하며 사소한 문제로 서로 오가는 방 앞의 복도에서 대판 싸우던 말소리가 아직도 귀에서 앵앵 울리는듯하다. 그래서 오늘은 아무도 없는 집에서 내 귀가 편해질 수 있도록 음악은 틀지 않는다.


아이들이 등교하고 난 뒤 어질러진 집 안을 훑어본다. 식탁에서 아침을 먹으며 아이들이 보던 책들을 덮어 책꽂이에 꽂아놓고, 전날 그릇 건조대에 말려 둔 접시들을 제자리에 넣고, 싱크대에 쌓아놓은 그릇들을 설거지한다.


설거지를 하며 듣는 물소리에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남매의 스포츠 활동이 늦게 끝난 날은 취침시간도 늦어지니, 다음날 아침 피곤함에 신경이 곤두서 남매는 꼭 한번 전쟁을 치른다. 그러면 기러기 애미는 기가 쪽 빨린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쫓아다니며 안아주고, 업어주고, 먹여주고, 닦아주느라 허리 한번 펼 때마다 곡소리가 나더니 7학년과 5학년의 막바지를 달리고 있는 아이들에게 손은 덜 가도 남매의 신경전을 보고 듣고 있노라면 늘 조마조마해 멘털이 탈탈 털릴 지경이다. 예민해진 첫째와 덩치가 커지고 힘이 쎄져 가끔 누나를 만만하게 보는 아들의 갈등을 늘 주시해야 하니 머리가 지끈 거릴 때도 있다.


욕실 거울에 오늘도 어김없이 찍혀있는 아이들의 손자국과 세면대의 흘린 치약자국을 지우며 생각했다. 왜 남편이 있는 동안에는 이런 것들이 보이지 않았을까. 애들이 지금 아빠가 없다고 '에잇, 엄마 더 힘들게 해야지!'하고 집을 더 어지르진 않을 텐데 말이다.


어느 날은 샤워를 하다 물이 더디게 빠지는 것 같아 샤워실 배수홀을 열어보니 머리카락이 잔뜩 끼어있고, 새벽에는 갑자기 집 안의 파이어 알림이 울려 깜짝 놀랐다. 매일 아침 잘 썼던 자동 에스프레소 머신은 빨간불이 들어오며 작동을 멈췄고 안방에는 전구 하나가 나갔다. 멀쩡했던 소파는 갑자기 주저앉았고 티비는 화면이 점점 밝아지더니 곧이어 까만 화면으로 바뀌다 급기야 화면은 나오지 않고 소리만 들린다. 해가 내리쬐고 비가 자주 오며 잔디가 쑥쑥 자라는 날들이 지속되며 마당 잔디에 발이 푹푹 빠져 발자국을 만들 수 있는 날도 오게 됐다. 하필 남편이 없는 이 시기에 마당의 나무 울타리는 삐걱거리다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바람에 넘어갔고 고쳐놓자마자 다른 한쪽의 펜스가 말썽이다. 그리고 아이들의 트램펄린 폴대는 부러졌다.


왜 하필 남편이 없는 지금이니??

그래도 기러기 애미는 하나씩 해결해 본다.


뜬금없이 주저 앉은 소파와 이빨빠진 펜스
발이 푹푹 빠지는 마당. 잔디 깎기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3시간 가까이 마당정리를 하면 꼭 얻게 되는 물집들





내가 남편에게 받는 Advantage : 사랑과 배려



남편은 연애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자상하고 배려 깊다. 우리 동네는 치킨집도, 중국집도 없다. 아이들이 외식을 할 수 없는 메뉴를 먹고 싶다 하면 남편은 퇴근하고 집에 조금이라도 일찍 도착하기 위해 점심시간에 냉장식품 외의 물건을 사서 차에 넣어 놓고 퇴근을 하며 한번 더 마트에 들러 냉장, 냉동재료를 사 와 아이들이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만들어준다. 뭐든 이렇게 자상한 아빠이기에, 아이들은 학교에서 아빠가 보고 싶거나 궁금하면 e-mail을 보낸다. 휴대폰이 없는 아이들이 먹고 싶은 음식, 저녁에 아빠와 하고 싶은 일들을 적어 보낸 e-mail은 남편의 편지 목록에 고스란히 남겨져있다.


남편은 혼자 장을 보는 것을 힘들어하는 나를 위해 가급적 점심시간이나 퇴근하며 장을 봐오거나 주말에 함께 마트에 간다. 남편은 저녁시간을 오롯이 가족과 보내기 위해 곧장 퇴근을 하고, 날씨가 좋은 날에는 BBQ를 위해 불을 피운다. 아이들의 방학이 코 앞에 다가오면 엄마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며 원두를 잔뜩 사서 팬트리에 가득 채워둔다. 남편은 내가 아이들이 투닥투닥 싸우는 소리에 신경이 쓰일까 안방에 들어가 쉬라고 말해주고, 주말에도 새벽에 일어나는 아이들을 조용히 데리고 나가 가끔은 내가 늦잠을 잘 수 있도록 배려해 준다. 이렇듯 남편이 맡고 있는 육아와 살림의 영역은 매우 넓다.


결혼생활 내내 변함없이 잘해주고 있는 남편에게 물었다.

"어쩜 이리 살림과 육아에 대해 불평불만 없이 잘해? 그리고 이렇게 척척 잘하면서 생색은 왜 안내?"


솔직해도 너무 솔직해 평소 닭살 돋는 말, 손발이 오그라드는 말을 절대 하지 못하는 남편이 답한다.



조금 더 체력 좋고 잘하는 사람이 더 하면 되지,
사랑하니까 힘들게 하고 싶지 않은 거야.
생색을 뭐 하러 내.
어차피 내가 조금 더 하면 당신이 덜 할 수 있잖아.
당신이 좀 더 쉴 수 있으면 나는 다행인거지.


그동안 나는 남편이 준 '사랑'의 이유로 얻은 ‘배려’로 모든 것을 나보다 잘하는 남편을 믿고 살림과 육아를 조금 덜 하며 없는 체력을 비축하고, 금세 충전하고, 아이들에게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아이들이 집안을 어지르고 사춘기의 날 선 짜증으로 힘든 것이 아니다. 우리 가정의 살림과 육아를 남편이 조금 더 함으로써 가족의 쿠션역할을 했던 남편의 부재가 이제야 티가 나는 것이다. 해도 해도 티가 나지 않던 살림은 여기저기 고장 나고 비워지고 남편이 집을 떠나니 이렇게 바로 티가 나는 것이다.


그래서 기러기 애미가 된 지금, 기러기 애비에 대한 고마움으로 가득하다.


오늘도 난 각자 다른 집으로 흩어져 play date 간 아들과 딸의 픽업을 해야 하고 주말에는 딸의 친구 가족과 함께 하는 캠핑을 준비한다. 다음 주 스포츠 경기에 참여하는 아들과 딸의 팀 간식을 준비해야 하고 경기를 보고 들어와 바로 저녁준비를 해야 한다. 미리 잡아둔 남매 친구들과의 sleep over도 번갈아 준비해야 하고 다음 주 잔디통을 비우는 날이 있으니 절대, 까먹지 말고 200평 넘는 마당의 잔디를 모조리 깎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예비 세입자들이 뷰잉을 하러 온다고 하니 집도 다시 한번 정리해놔야 한다.


내가 잔디를 깎는건지 기계에 끌려가는건지 모르겠다


남편이 없어 하나부터 열까지, 아침부터 밤까지 바쁜 기러기 애미 앞에서 또다시 어지르고 싸우는 아이들이지만 남편이 나에게 생색내지 않고 티 내지 않고 주었던 ‘사랑하니까' Advantage를 그리워하며 내 입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려거든 입을 꾹 다물고 참기로 한다.


비록 속에서 천불이 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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