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과일을 즐겨 먹는 편이 아니라, 가족 모임 때마다 엄마의 잔소리에 억지로 겨우 한두 조각을 집어 든다.
혹은 체중 감량이라는 절박한 결심이 섰을 때, 비교적 먹기 쉬운 바나나를 집어 들어 '끼니마다 두 개씩 먹으면 금방 먹지.'라며 쇼핑카트로 옮긴다.
그렇게 금방 다 먹고 없을 줄 알았던 바나나는 폴리페놀 산화효소와 공기 중의 산소가 만나 '퀴논'이라는 멜라닌을 생성시켜 바나나를 거뭇거뭇하게 갈변시킨다. 장기간 산소에 노출되거나 껍질을 벗기거나, 어딘가에 긁히는 등 물리적 대미지를 받아 갈변된 바나나(참지 못해 시킨 엽떡에 밀려 방치된 바나나)는 아무도 안 볼 때 버려야 그나마 비참함이 덜하다.
사실 바나나는 갈변 과정에서 내부의 복잡한 전분이 효소에 의해 분해되어 과당, 포도당으로 바뀌어 달콤함이 더 해지고 바나나 특유의 향을 내는 '이소아밀 아세테이트'라는 화합물이 증가해 풍미가 깊어진다. 게다가 갈색 물질 자체에 항산화 효과가 있어 면역력을 높이는 효과는 노란 바나나보다 무려 8배까지 높아진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바나나의 갈변은 썩어가는 과정이라기보단 익어가는 '숙성 과정'에 가깝다.
이제 막 서른 중반에 접어든 나에게도 갈변이 찾아왔다.
과거 서툴렀던 판단의 오류들과 세월의 스크래치는 지금 이 순간도 내 몸 곳곳에 기록되고 있다.
나는 지금 최적의 달콤함과 풍미를 위한 숙성 과정일까 아니면 임계점을 지나 썩어가는 과정일까.
여전히 좁은 나의 방안, 그 안을 가득 메운 꿈의 총량만큼은 더 익어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