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태어나 자라서8살에 도시로 이사했다. 그리고 결혼하기 전까지 15번의 이사를 경험했다. 충청도 말씨의 느린 여자아이는 도시로 이사와서 경상도 빠른 말투의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없는 형편에 잘 씻지도 못하고 꼬질했고, 여기저기 물려받은 옷에는 내 취향은 없었다.
부모님은 시장에서 채소 노점 장사를 하셔서 늘 밤늦게나 집에 오셨다.대가족이었지만 짐은 단촐했다. 한해를 다 채우지 못하고 이곳저곳 유랑민처럼 이사 다니기 일 쑤 였다.
우연히 책을 보다가 연탄가스를 마시고 기억을 잃게 된 작가의 사연을 읽었다.
불현듯 나도 그런 게 아닌가 싶었다.
우리 집은 늘 작은 방 두 개의 다세대주택이었고 공용화장실에 연탄보일러 집에 살았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산골에 살았다면 좋은 추억도 많았을 텐데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은 그 시절은 망각의 방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일까.
태어나 자란 집에서 학교를 다니고, 결혼을 하고, 자녀를 데리고 부모님을 찾는 그런 이상적인 가정은 몇이나 될까.
가난했던 시절,시골에서 상경한 가족이 도시를 전전하며 몸으로 겪어냈던 그 찡하고 헛헛한 역사는 잊고 싶지만 번번히 꿈속에 등장한다.
유년의 그 시골 내음과 풍경은 사라졌지만 도시서 40년을 살고 다시 찾은 농촌에서 어딘가 남아있는 내 유년시절의 채취를 다시 맡고 있다.
포슬포슬한 흙을 만지는 맨손의 촉감과 풀벌레, 개구리, 뻐꾸기 우는 정겨운 소리들과 추운 겨울 끝에 아련히 찾아오는 봄의 따스한 훈기를 이젠알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