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읽다 쓰다
너무 많은 영화와 만화, 그 ‘그림’들 때문에 프랑켄슈타인은 꿰맨 자국 도드라진 푸르죽죽한 피부에 덩치 큰 괴물을 일컫는 이름이 되었다. 실제로는 이야기의 주인공 박사의 이름, 정확히는 성이 프랑켄슈타인이며, 그가 만들어낸 피조물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악마, 괴물, 원수 등으로 불릴 뿐이다. 자식이 부모의 성을 따르듯 창조자의 이름을 받는다고 가정하면 프랑켄슈타인이라 부르지 못할 것도 없긴 하다. 하나 너무 빨리 창조자가 된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신이 될 수 없는 것만큼이나 부모가 될 마음도 없다. 실험이 성공해 피조물이 눈을 뜨는 순간 추악한 괴물, 악마 같은 시체에 혐오를 퍼붓고 달아난 거다.
또 하나의 굳건한 클리셰인 벼락과 번개. 생명과 힘의 원천으로 기억하지만, 원작에서 폭풍우는 배경 중 하나일 뿐이다. 우리가 잊고 있는 훨씬 중요한 배경이 있는데, 북극이다. 이 이야기는 북극과 빙하를 향한 겹겹의 이야기다. 편지 속의 편지.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
가장 바깥쪽에 있는 작가의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메리 셸리는 스무 살도 안 되어 이 책을 썼다. 밤에 모여 앉아 괴담을 이야기해 보자는, 친구들끼리의 장난 비슷한 기획이었다고 한다. 메리 빼고 모두 대단한 시인들이었고, 그들에게는 기분 전환용 유희였지만 메리는 진지했다. 끝까지 매달려 책을 써냈고, 그 결과가 지금의 고전이다.
여성이 아무 권리를 갖지 못하던 때였다. 메리는 똑똑했지만 여인의 지성은 별 의미가 없었고, 가까운 환경도 그리 좋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녀를 낳다 죽었고, 새어머니는 메리를 좋아하지 않아 학교에도 보내지 않았다. 형제가 넷 있었는데 부모가 같은 아이는 다섯 중 한 명도 없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된 죽음의 이야기는 메리 셸리를 평생 따라다녔다. 동복 언니와 남편의 전 부인이 자살했고, 다섯 아이를 낳았는데 넷이 죽었으며, 그녀에게 이름을 준 남편 셸리도 함께 산 지 몇 년만에 죽었다.
프랑켄슈타인을 쓸 무렵 메리 셸리는 어리고 가난하고 외로웠다. 사랑의 도피를 해서 아버지에게 의절 당했고, 안정하지 못하고 떠돌았으며, 아이들은 죽고 남편과도 이내 소원해졌다. 그녀의 외로움과 슬픔이 소설의 원고지가 되었다. 서늘한 슬픔이 글자와 글자의 획 사이 골을 타고 흘러 다닌다. 버림받은 아이, 태어나자마자 인간의 악을 뒤집어쓰고 괴물로 규정지어진 아이의 울음이 얼음의 골짜기마다 메아리친다.
사실 괴물이 된 아이가 바라는 건 많지 않았다. “내 이야기를 들어 달라.” 미치광이 과학자의 이야기, 신의 영역에 도전한 천재의 이야기는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이루는 수많은 이야기 중 한 조각일 뿐이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 등장인물들은 모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보고, 듣는다. 다시 다른 사람에게 편지를 보낸다. 자기가 보고 들은 이야기를 이야기한다. 어떤 이야기도 머물러 있지 않고, 끝나지도 않는다.
왜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필요했을까. 학교에 가지 못한 메리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혼자 그리고 몰래 배웠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사상가이자 작가였던 아버지와 친구들의 모임을 엿보고 이야기를 얻어들었다. 몰래 했던 건 새어머니가 싫어했기 때문이다. 의자 밑에 숨어 시 낭송을 듣다 새어머니에게 들켜 끌려 나갔다는 일화도 있다. 그럴수록 메리는 더 게걸스럽게 지성과 문학을 탐했을 테다. 금기는 매혹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니까.
천장 아래 어두운 방. 금기의 실험으로 우리의 주인공이 태어난 공간. 한데 다른 그림이 떠오른다. 소녀가 스웨터를 뜨고 있다. 저주를 풀어줘야 할 오빠들이라도 있는 걸까. 사실 그녀가 뜨는 건 이야기다. 그녀를 낳다 죽은 어머니, 낳자마자 죽어버린 아이들.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과, ‘그런’ 모습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이해받지 못하고 혐오와 증오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죽은 아이를 다시 낳는 꿈을 꾸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예쁘게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은 몸과 마음이 있을까. 하나 인간은 그럴 수 없다. 할 수 있는 건 이야기뿐이다. 외롭고 슬픈 인간의 이야기들을 메리 셸리가 떠내고 있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은 그렇게 새로 태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