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린 Sep 22. 2022

잊히지 않는 것도 있다

이경란 <빨간 치마를 입은 아이>를 읽다 쓰다

그림 하나가 자꾸 떠올랐다. 이게 대체 뭘까 하다, 소설 속의 장면 아니 읽으면서 멋대로 그려봤던 장면이란 걸 겨우 기억해냈다.


아니 장면도 아니다. 그림이란 말도 정확하지 않다. 소리였다. 그러니까 바퀴 굴러가는 소리. 문 밖에서, 벽 너머에서, 들들들들 굴러가는 소리. 효도 의자를 타고 움직이는 소리. 먹을 걸 찾는 소리. 살아있는 살고 있는 타인의 소리. 들들들들들.


숨을 참고 귀를 기울인다. 벽 너머의 소리는 내 기척을 감춰야 들을 수 있다. 살아있지 않은 척, 없는 척? 그게 될 리 없잖아. 살아있는 것들은 무게가 있고, 무게가 있으면 떨어지고, 떨어진 것들은 소리를 낸다. 떨어지는 속도가 각기 달라서, 짝을 잃은 슬리퍼와 반지가 되고, 금이 가고 틈이 생기고 틈으로 사물들이 떨어진다. 붉은 것이 흘러내린다. 쉿, 소리 내면 들킨다.


아홉 개의 소설은 없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 떨어짐의 이야기, 무게가 내는 소리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남편이 없고, 상대해 주는 이웃이 없고, 엄마가 있지만 없고, 열 달 품었다 낳은 아이가 없고, 결혼사진이 없고, 돈이 없고, 일자리가 없고, 메시지에 대답하는 친구가 없고, 집이 없고, 강아지와 고양이가 없고, 브래지어와 팬티가 없고, 시간도 없고, 없는 것들에 밀려 ‘나’마저 사라지기 직전이다.


‘있던’ 것들은 사라지기 전 소리를 낸다. 위장으로 사라지는 라면과 김과 믹스커피, 살아있는 몸이 밀어내는 배설물, 동물의 사체, 쌓여있는 자투리천이 쓸모를 다하고 떨어지는 소리. 바닥과 충돌하는 소리가 비명 같아서 숨죽여 귀를 기울이고 만다. 사실은 듣고 싶지 않은데도. 귀를 막고 아아아아아아아아 큰 소리로 덮어버리고 싶은데 나는 조용하다. 말도 없고 울지도 않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는다. 소설에는 나의 목소리도 ‘없다’. 온갖 사물이 떨어지고, 깨지고 사라지는 소리로 바깥이 소란한데 나는 벽 이쪽에서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이다.


말 없는 아이. 화자가 꼭 아이인 것만은 아닌데 벽 뒤에서 숨죽여 귀를 기울이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자꾸 떠오르는 거다. 입을 막고 숨어 있는 아이가 안쓰럽다. ‘없는’ 척해야 하는 존재에게는 바깥의 모든 소리가 공포다. 타인이 밥을 먹고 티비를 보고, 살아있는 살고 있는 소리만 들려도 흠칫 놀란다. 존재보다 소리가 참기 힘들 때가 있음을, 들을 수 있는 이라면 모두 안다.


들들들들 벽 너머에서 바퀴 굴러가는 소리. 세상이 굴러가는 소리. 아이가 소리를 듣고 있다면 한 번쯤 표시를 내 주었으면. 싫으면 싫다고, 시끄러우면 시끄럽다고 소리라도 질러주면 좋겠다. 울지 않는 아이가 왜 착한 아이지? 아이의 울음소리가 없는 세상은 상상만으로도 공포스럽지 않나.



매거진의 이전글 괴물이 이야기하는 인간의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