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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린 Sep 30. 2022

풀때긴 줄 알고 덤볐으나 지구에 놀라 시작도 못하고

호시노 도모유키 <인간은행>을 읽다 쓰다

다시 태어나면 난초가 되고 싶다.


작가소개에서 이 문장을 발견하고 눈물이 핑 돌았다. 아직은 없지만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내 답은 정해져 있다. 물풀이라고 할 거다.


사실 무의미한 질문이다. 재미도 없고 묻는 이의 성의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지면과 시간을 채우기 위한 뻔한 질문에 따라오는 건 똑같이 뻔한 답이다. 한데 대답이 준비돼 있는 건 어째선가.


인터넷이란 걸 처음 접하고, 아이디라는 말에 겨우 익숙해졌을 때. 인터넷 벌판을 헤매며 회원가입하는 게 일이었을 때. 필수기입사항 중에 비밀번호를 잊을 경우를 대비한 본인확인용 질문이 있었다. ‘아버지 이름은?’ ‘사는 곳은?’ 따위 정해진 질문에 답을 써넣는 식이었다.


내가 주로 선택하는 질문은 ‘애완동물(그땐 반려동물이란 말이 없었다) 이름’, 답은 술래. 이 질문이 없을 땐 ‘다시 태어나면 되고 싶은 것’을 골랐다. 특이한 질문이라 생각하며 크게 망설이지도 않고 써넣었던 기억이다. 다음 생엔 뭘로 태어나고 싶어? 사람은 싫어. 동물도 별로야. 그럼 나무가 될까? 너무 큰 것도 눈에 띄는 것도 싫어. 그냥 풀이면 돼. 장소는? 물속이라면 좋지 않을까. 물풀이 되어 바다 깊은 한구석에서 조용히 흔들리고 싶어.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무도 묻는 사람이 없어 다시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누구를 방해하지 않고 구석에서 조용히 살고 싶어. 물결에 가만히 흔들리면서 세상구경 조금만 하다 갈게. 난초가 된 호시노 상, 아니 호시노 상이 된 난초를 상상하니 그런 마음이 보이는 것 같았다. 고요한 곳에 홀로 서서 은은한 향으로 주위를 채우는 풀. 아무도 모르게 정화한, 깨끗하고 따뜻한 공기 속에 피워낸 꽃.


내 멋대로 만들어낸 그림이 너무 좋아서, 그의 따순 웃음을 확인하고 싶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읽자마자 한 방 먹었다. <스킨 플랜트>를 넘어 <지구가 되고 싶었던 남자>라니. 스케일이 다르잖아! 구석의 풀 한 포기로 흔들리고 싶은 욕망은 혼자만의 망상이었다. 풀때기가 되고 싶으면 혼자 하자. 스미마셍 호시노 상.


그래도. 누군가를 방해하지 않는, 아니 눈에 띄지 않는 도움을 주는 존재이고 싶다는 마음은 제대로 읽은 것 같다. 상상했던 따순 웃음도 지면마다 배어 있다. 역자인 김석희 선생님은 ‘우리가 조금 하다 마는 상상을 호시노 상은 끝까지 한다’ 고 했다. ‘끝까지 가는’ 상상은 종종 기괴하고 더러는 오싹하다. 하나 서늘한 문장이 쓰인 지면의 빈 곳은 미소로 채워져 있다. 오소소 소름 돋은 피부를 쓰다듬느라 잠시 눈 돌릴 때마다,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소설가와 눈이 마주쳤다. 그 속에 따숩고도 장난스런 웃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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