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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린 Oct 04. 2022

우리에게 질문할 권리가 있을까

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읽다 쓰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은 건 심리학 공부를 하면서였다. 프로이드, 융, 에릭슨...으로 나열되던 이름들 중 어디쯤에서 빅터 프랭클이 튀어나왔고, ‘의미치료’라는 말이 꽤 매력적이었던 거다.


그게 실수였다. 발견할 ‘의미’를 미리 정하고 읽었던 것. 죽음의 수용소를 겪었던 인간이 극한의 상황에서도 인간성은 죽지 않으며 그러니 삶은 살 만하다고 말할지니. 그 ‘말’을 찾기만 했을 뿐 책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독서가 실망스러웠던 건 내 탓이었다.


게다가 후유증까지. 나치 수용소 생존자의 말을 듣는 게 더 힘들어졌다.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도 급박한 계기가 생기지 않으면 책을 읽지 못하고 미루게 되었다. 같은 실수를 또 할까 봐 걱정됐던 거다. 전쟁 이야기를 워낙 무서워하는 차에, 잘 됐다며 핑계 뒤에 숨으려는 심산까지 작용했을 터였다.


프리모 레비를 읽기 시작했을 때 고정관념 없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절대 굳은 머리로 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오히려 더 경직된 상태로 읽었다는 얘기다. 처음에는.


기우였다. 생각할 겨를 따윈 없었으니까. <이것이 인간인가>와 <휴전>을 한 번에 읽어내리면서, 그의 말을 빨아들이기 바빴다. 읽는 내내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했다. 이후로 나는 레비 얘기를 자주 하지만, 다른 설명 없이 꼭 읽어보라고만 한다. 할 말이 너무 많은데 할 수 있는 말은 얼마 없다.


그의 이름을 알게 된 건 서경식의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에서였다. 한국 전체가 그랬는지도 모른다. 프리모 레비의 책이 우리말로 처음 출간된 게 이 책이 나온 1년 뒤였으니까.(내 짐작일 뿐, 아닐 수도 있다.) 그가 죽고 30년 후의 일이다. 이탈리아 화학자 레비는 아우슈비츠라는 이름이 대명사가 된 나치 절멸수용소에서 생존한 유대인이다.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는 서경식이 레비의 무덤이 있는 토리노에 다녀와서 쓴 책인데, 이 여정은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되었다. 재일 조선인 2세 학자이자 작가 서경식은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의 서승·서준식 형제의 동생이다.


서경식의 얘기가 또 너무 많으니 따로 하기로 하고 지금은 이것만. 국내 출간된 프리모 레비의 책 어디서나 그의 이름을 볼 수 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그를 레비의 역자로 착각하기도 하지만 그의 모어는 일본어다. 잘은 모르겠으나, 한국에 프리모 레비를 알린 인연과 그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는 점 때문에 안내자 역할을 맡게 된 듯하다.


그런 그가 이 책, 프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두고 ‘나치즘이나 유대인 학살에 관한 서적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지만, 개중에 굳이 딱 한 권만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 책을 권할 것이다.’라고 했다. 1986년(우리나라에는 2014년)에 나온 책으로, 레비는 1987년에 죽었다. 즉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들이다.


레비는 화학자였다. 평생 과학자이자 연구자로 살았던 그는, 자신을 작가로 생각해본 적은 없으며 수용소 경험이 없었다면 글을 쓰는 일도 없었을 거라고 했다. 이 말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놀라운데, 그 얘기도 미뤄야겠다. 한 가지만 말해 두자. 나는 프리모 레비를 읽을 때마다 작가란 무엇인가, 글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생각한다.


이것저것 다 미루고 대체 무슨 얘기를 하겠다는 건가 싶겠지만, 벌써 A4 한 장 분량의 얘기를 했다. 레비의 말은, 그냥 들으면 된다. 안다, 한 마디 추임새도 넣지 않고, 질문 하나 없이 듣기만 하는 건 몹시 어렵단 걸,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힘들고 괴롭고 무슨 반응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그래야 할 때가 있다, 그 어떤 말도 붙일 수 없고 듣기만 해야 할 때가.


“거의 모든 생환자들이 말로든 글로 남긴 그들의 기억 속에서든 포로생활을 하던 밤에 자주 되풀이되던 꿈을 상기한다. 집으로 돌아가 소중한 사람에게 자신이 겪은 고통들을 안도하면서 또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꿈, 그러나 믿어주지 않는, 아니 들어주지도 않는 꿈이다. 가장 전형적인 (그리고 가장 잔인한) 형태로는 상대방이 몸을 돌리고 침묵 속으로 가버린다.” -10p-


악몽이 되풀이되는 한 그들의 불행도 끝나지 않는다. 악몽의 빈도라도 줄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포로생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중간지대가 거의 없이 두 가지 범주로 뚜렷이 나뉜다. 곧 침묵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다.” 레비는 이야기를 하는 쪽이었다. 그가 쓴 “글들은 그의 안에 들어 있었던 그를 압도하고 있던 무엇이었고 그는 그것들을 밖으로 쫓아내야 했다. 그것들을 말해야 했다.” 다른 사람들은 아니다. 말을 해선 안 되고 질문하면 안 된다. 피해자와 증인에게 ‘왜’냐고 물어서는 안 된다. 가해자를 ‘용서’했냐고 물어서도 안 되고, 그 단어를 듣게 함으로써 은연중에 강요해서는 더욱, 절대 안 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를 쓴 후 많은 편지와 질문을 받았고, 8장 ‘독일인들의 편지’에 그때 주고받은 이야기의 일부를 썼다. 그는 대부분의 편지에 굉장히 성실하게-실험하는 과학자의 태도로- 답장을 했다. 독일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길 원해서였다고 한다. 의무감도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은 증언을 했고(책을 썼고) 증언대에 나왔으니 질문에 답해야 한다는 의무감. 증인 프리모 레비는 한 장(7장 ‘고정관념들’)을 고스란히 대답하는 데 썼다. ‘왜’냐는 질문에.


‘왜 당신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가해자에게 해야 할 질문을 엉뚱하게 피해자-증인에게 던질 때, ‘당신들의 무엇이 그 일을 야기했는가?’라는 의미를 제로값으로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피해자-증인의 치료되지 않은 상처 위에 비난과 죄책감까지 던지는 거다. 가해자 중 누구도 인정하거나 해명하지 않은 죄를 피해자가 필사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왜 도망가지 않았는지. 왜 저항하지 않았는지. 왜 사전에 피하지 못했는지.” 누가 그들이 아닌 우리에게 질문할 권리를 주었을까. 어떻게 그에게 용서했느냐고 물을 수 있었을까. 책 전체가 그렇지만 이 장은 특히나 아프다. 너무 화가 나고 너무 슬프다. 하지만 이 감정은 내 것이 아니다. 말을 붙여서는 안 된다. 그저 들어야 한다.


“‘용서한다’는 것은 제 말이 아닙니다. 제게 짐 지워진 말이지요.”


  

1년 후, “삶의 목표는 죽음에 저항하는 최선의 방어”라 말했던 프리모 레비는 자신이 선택한 삶의 끝을 향해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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