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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린 Oct 13. 2022

그들은 썼다. 그리고 읽었다.

서경식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을 읽다 쓰다

훗날 보고할 수 있게 고통을 견디자. 이것은 문학의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고, 가장 의심스러운 명제 중 하나다. Phaeacia 사람들 앞에서 눈물짓는 오디세우스는 그의 불행이 후세 사람들에게 이야기의 소재로 도움이 될 것이라고 그들에게 위로를 받는다. 그의 불행이 미래의 인간에게는 노래가 된다. 살해된 자들의 운명을 훗날 이야기하기 위해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타자에게 알리기 위해, 또 고뇌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고뇌, 고문, 존엄의 상실을 견디는 것이다. 이같은 문학의 핵심적이고 유화적인 양식이 그로테스크한 오해라는 것, 바로 그것이 이딸리아 태생의 유대인 쁘리모 레비의 연대기 안에 표현되어 있다.

-243p.


서경식은 프리모 레비의 고향 토리노를 다녀온 후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를 썼다.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로, 살아 고향에 돌아와 나치 절멸수용소에 대한 책 <이것이 인간인가> <휴전> <주기율표>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등을 썼다. 화학자였던 그는 수용소에 가지 않았더라면 작가가 되는 일은 없었을 거라고 했다. 서경식은 일본어가 모어인 재일조선인 2세 학자로, 이탈리아 유대인 프리모 레비와의 접점은 없다. 무엇이 그들에게 책을 쓰게 했을까.


프리모 레비가 <이것이 인간인가>에 쓴 일화 중에 수용소 동료에게 <신곡>을 들려주는 장면이 있다. 암송하고 있던 이탈리아 시 <오디세우스의 노래>다. 도중에 시구가 좀처럼 기억나지 않을 때, 레비는 다시 기억나게만 해준다면 생명줄과 다름없는 수프를 댓가로 치러도 좋다고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로맹 가리의 소설 <하늘의 뿌리>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와 무척 닮았다. 수용소 생활 중 한 사람이 코끼리를 상상하기 시작한다. 대지를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코끼리에게 감정을 이입해 ‘자기’를 탈출시킨 거다. 효과가 알려지면서 모든 포로들이 자기의 코끼리를 키우게 되는데, 어느 날 스파이의 밀고로 이 ‘탈출’이 발각된다. 경비병들은 즉시 상상의 코끼리를 사냥하기 시작한다.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한 이는 숨겨둔 코끼리를 동료에게 부탁하고 대신 죽는다.


망각 속의 시구와 상상의 코끼리. ‘있지’ 않은 그것들을 목숨과 바꾸더라도 절대 놓을 수 없었던 이유를 서경식은 이렇게 얘기한다.


“강제수용소에서 <신곡>을 암송하는 작업은 그에게 과거와의 관계를 그리고 자신을 키워준 문화와의 관계를 회복하게 해주었다. 자신의 마음이 아직 기능하고 있음을 확신하게 해주었다. 요컨대 자신을 재발견케 해주었던 것이다.


인간은 짐승과 다르다. 때문에 노예보다 못한 신분으로 추락하더라도 ‘덕과 지’를 구하는 것이다. 단테를 상기하고, 오디세우스처럼 끝없는 고난의 항해를 이겨내려고 하는 것이다. 언젠가 다시금 지옥에서 인간 세상으로 생환하여 증언하기 위해서.” -155p


그래서 프리모 레비는 증언했다. 책을 쓰고, 그것을 읽고 독일인들이 보낸 편지에 답장을 보냈다. 독일인들을 이해하기 위해 질문하고 답했다. 그는 과학자였고, 물질을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과정은 살아가는 일 그 자체였다. 이해할 수 없는 무엇-사람, 사건, 역사-은 그에게 고통이었다. (“그러나 나는 독일인을 이해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무언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은 아픔으로 가득 찬 공극, 바늘에 찔린 구멍, 충족을 구하는 한없는 초조함이 되곤 합니다.” -<이것이 인간인가> 중- )


또 한 사람의 아우슈비츠의 증언자인 장 아메리(한스 마이어)와도 레비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의 6장 ‘아우슈비츠의 지식인’은 장 아메리 이야기다. 되찾은 삶을 잘 살아가는 듯 보이기도 했던 아메리의 자살은 그에게 몹시 충격이었을 테다. 하지만 이때의 레비는 아직 절망할 수 없었다. 서경식의 말이다.


“쁘리모 레비와 장 아메리를 구분한 것은 무엇일까? 나는 어쩌면 ‘이해’에 대한 기대치의 차이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아메리는 ‘독일인’을 이해하는 것에 거의 절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의 레비는 아직 절망할 수 없었다. 그는 ‘이성’을 믿고 “서로 대화하는 것을 진보를 위한 최상의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혹은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226p


그리고 어떻게 되었을까. 장 아메리가 죽은 건 1978년이고 그의 얘기까지 담아 레비가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낸 건 1986년이다. 일 년 후 프리모 레비도 자살로 생을 끝냈다. 장마다 신중하게 제목을 붙이는 그가 마지막 책의 마지막 글에 쓴 제목은 <결론>이다. 그가 정말 결론을 찾았다는 의미일까.


그렇다 해도, 결론이 정말 존재한다 해도 타인인 우리는 알 수 없다. 결론이라는 제목 아래 써넣은 문장을 읽는 독자일 뿐 저자를, 프리모 레비를 이해하지는 못한다. 바로 그 ‘공극’을 서경식도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초조함은 토리노로 가 말 없는 무덤 앞에 서게 했다. 프리모 레비를 이해하고 싶었을 테다. 그가 자살한 이유, 뒤집어 말하면 자살하기 직전까지 살아남은 이유를 이해하려 노력했을 테다.


그가 왜? 하나는 그가 이방인이기 때문일 테다. 그의 책을 몇 권 보니 ‘서경식’이라는 이름의 디아스포라가 어렵지 않게 읽혔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 불행한 가족사다.


“나는 일본 국민화를 거부하지만 일본어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 안의 수인이다. 내 형들이 젊은 날에 한국으로 건너갈 각오를 한 것은 이 감옥 생활의 초조함에서 벗어나려는 일념 때문이었으리라.” -171p


여기서 형들은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의 서승, 서준식이다. 형제는 1971년 한국 유학 중에 간첩 혐의로 잡혀 들어가 각각 19년, 17년 옥살이를 했다. 서준식의 애초 형기는 7년이었지만 전향을 거부해 10년을 더 구금되어 있었다. 잦은 고문과 테러로 생사조차 보장할 수 없었다. 재판을 보고 온 어머니가 “그 앤, 화상을 입어 귀도 없더라”며 통곡했다고 한다. 서승이 고문의 고통 때문에 몸에 석유를 부어 분신하려 했던 거다. 서준식도 손목 동맥을 끊어 자살을 시도했었다.


어머니는 결국 아들들을 만나지 못하고 죽었다. 서경식은 형들의 구호를 위해 홀로 분투했지만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그는 이방인이었다. “조국의 동포들에게도, 옥중의 형들에게도, 죽음을 눈앞에 둔 어머니에게도 완전히 무력하다고 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때, 한국에서 전두환 정권이 광주 시민들을 학살하고 형들은 기약 없이 갇혀 있고 어머니가 죽어가던 때, 서경식은 병실에서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이것이 인간인가’의 일본 제목)>를 읽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몇 년 뒤 서경식은 프리모 레비의 무덤에 다녀왔고 이 책을 썼다.


모든 저자가 자기를 이해받기 위해 글을 쓴다는 건 흔한 오해다. 물론 이해받고 싶어 쓰는 사람도 있지만, 이해하기 위해 쓰는 이도 있다. 프리모 레비와 서경식이 그랬고, 장 아메리도 그랬으리라. 그리고 또 많은 이들이.


글을 쓰는 이유는 어쩌면 글의 수만큼 있을 테지만, 읽히기 위해서가 첫 번째일 수밖에 없다. 그게 글의 존재 이유니까. 인간은 글을 쓴다. 어딘가로 보내기 위해서. 그곳에서 누군가에게 읽히기 위해서. 그곳이 수용소일지, 연구실일지, 먼 나라의 병실일지, 무덤일지, 누구에게 도착할지는 알 수 없지만, 결론을 찾을 수 없다 해도. 읽히기 위해 쓰고 또 쓴다. 그들은 그렇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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