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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린 Oct 20. 2022

끝없이 반복되는 이야기

니콜라이 레스코프 <왼손잡이>를 읽다 쓰다

중학교 수업에는 역사 과목이 있었다. 국사, 세계사로 나눠 일주일에 무려 두 시간이나. 우리 반에는 여자 교사와 남자 교사가 번갈아 들어왔는데 여선생 쪽이 인기는 좀더 많았다.


여학교인데도 남선생보다 인기가 있었던 건 그가 이야기를 정말 재미있게 했기 때문이다. 사실 둘 다 청산유수, 수다쟁이, 타고난 변사였다. 따분한 교과서 내용을 여선생은 대하드라마처럼, 남선생은 판타지소설처럼 줄줄 읊어주었으니 아이들은 공식적으로 놀 수 있는 체육보다 역사 시간을 더 기다렸다. 여자애들 입맛에는 사랑과 시기와 암투가 주 내용인 대하드라마 쪽이 찰떡이었던 모양이지만 나는 판타지도 좋아했다.


남선생님이 해준 이야기 중 유독 인상적이었던 전설 한 자락이 있다. 세계에서 세밀한 공예를 제일 잘 하는 스위스에서 맨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가는 시계부품을 만들어 일본에 보냈는데 구멍을 뚫어 되돌려 보냈다는 이야기.


그날은 일본에 대한 수업이었던 모양이고, 산업기술이라던가 외교라던가 뭐 그런 따분한 내용들을 아이들이 졸지 않고 들을 수 있도록 고심하여 만든 이야기였을 터다. 사춘기 여자애들에게 그런 노고를 헤아릴 주변머리가 있을 리 없고, 한 시간 웃음으로 때울 수 있으면 그뿐이었지만.


한참 후에야. 일본과는 한참 먼 몇 세기 전 러시아에서 이 전설을 발견하고 놀랐다. 레이디 멕베드로 알게 된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왼손잡이>에 똑같은 모티프가 쓰여 있었던 거다. 기계벼룩을 선물했더니 러시아 기술자가 거기에 편자를 달아 되돌려 보냈다는 전설. 왼손잡이는 가장 뛰어난 장인의 이름이다.


역사 선생이 레스코프를 읽었던 걸까 뒤늦게 궁금했지만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가 모방을 했건 표절을 했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게다가 이걸 자랑했다가 더 큰 거에 당했다는 배틀의 모티프는 신발의 주인을 찾는 이야기만큼이나 흔하다. ’옛날 옛적 어느 나라 어느 마을’ 어디에나 있는 이야기다.


그래서 재미있다. 처음 듣는 새로운 이야기도 좋지만 언젠가 어디선가 들었던 이야기도 충분히 재미있다. 당신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발견의 재미가 있어 언제까지나 지치지 않고 쓰고 읽을 수 있다. 타고난 이야기꾼 레스코프가 하려던 이야기도 결국 이것 아니었을까.



오늘날 툴라에 전설적인 왼손잡이와 같은 그런 장인들이 더이상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기계문명이 제각기 다른 재능과 소질들을 균일화시킨 데다가, 천재들이 더이상 근면과 정확성을 위한 싸움에 투신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계문명은 노동임금을 올리는 데는 기여할지 몰라도, 때때로 일반적 잣대를 뛰어넘어 민초들의 상상력을 자극함으로써 이 왼손잡이 이야기와 같은 허구적 전설을 창조하는 예술가적 대담성을 높이는 데는 기여하지 못한다.


물론 노동자들은 기계 과학의 실제적 적용을 통해 생기는 수익을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긍심과 애정을 가지고 지나간 옛 시대를 회상할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서사시, 그것도 매우 ‘인간적인 영혼’을 지닌 서사시인 까닭이다.

-<왼손잡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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