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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린 Oct 29. 2022

남은 생은 사람으로

박수자 <먼 길 나에게로 돌아오는 길을 읽다 쓰다>

박수자라는 이름을 알게 된 건 어디선가, 여러 출판사에서 퇴짜 맞고 지원금을 받아 책을 냈다는 이야기를 읽고서였다. 강단에 감탄하고 용기마저 얻었다. 나는 저토록 꿋꿋했던 적이 있었던가. 스스로를 자신하고 다른 길을 찾아 안내하며 기운을 돋우어 보았던가. 길이 막히면 나를 탓하거나 연민만 하다 돌아서기만 하던 마음 중 얼마큼이 진심이었을까, 그중 또 얼마큼이 글을 향해 있었을까 뒤적여 보았다.


이 언니 좋아!


이런 생각을 할 땐 대개 말 잘 하고 쌈 잘 하는 이를 만났을 때. 상황과 상대에 기죽지 않고 할 말을 하는 사람이 좋다. 낯을 심하게 가리고 목소리가 작은 나는 늘 당당하고 싶었다. 맘처럼 잘 되지 않아 속상했다.


여중 여고에 출몰하는 바바리맨도 흉흉했지만, 뒤늦게 펄펄 뛰는 학주가 더 고역이었다. 중학교 때 여학주, 고등학교 때 남학주가 어쩜 그리 로봇처럼 똑같았는지. 학주를 찍어내는 공장이라도 있나 의심스럴 지경이었다. 그들은 바바리맨이 유유히 사라진 뒤에야 교문 밖을 두리번대다 들어와서는 교실을 습격하곤 했다. 수업중에 들이닥쳐 복장검사를 해대는 거다. 블라우스에 속옷이 비치거나 스타킹이 얇다며 적발된 아이들은 손바닥이며 엉덩이를 얻어맞았다. 이유인즉슨, 가시나들의 칠칠치 못한 몸가짐이 범죄를 유발한다는 거였다.


놀란 눈을 진정시킬 겨를도 없이 범죄자와 범죄를 유인했다는 누명까지 쓰게 된 억울함은 미치고 팔짝 뛰다 머리풀고 춤을 춰도 시원찮을 지경이었지만 호소할 데라곤 아무데도 없었다. 우리 모두 알았다. 성추행 아니라 성폭행을 당해도 ‘가시나’ 탓이 된다는 걸. 버스에서 험한 일을 당해도 혼자 삭이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가시나들은 울 때도 숨어서 울었다.


어째서 어른들은 잔소리가 먼저인가. 그들의 걱정하는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고 속상함에서 비롯된 화라는 건 알았다. 하나 순서가 바뀌지 않았나. 위험에서 지켜주고 다친 마음을 살펴주는 게 먼저여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폭력을 폭력으로, 그것도 엉뚱한 데다 되갚는 선생들은 어른에 대한 믿음을 잃게 했다. 어른이란 아이들을 보호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런 불신은 세상을 황야로 만든다. 황야에서는 각개전투다. 자기 몸은 자기가 돌봐야 한다. 누구의 도움도 기대하지 말고.


한데 가끔 무법자가 있다. 오지랖 휘날리며 여기저기 나서고,필요한 순간에 기가 막히게 나타나 적절한 쌍욕을 날리기도 하는 이가. 이럴 때 존경심과 함께 절로 대사가 튀어나온다. 이 언니 멋져!


그렇게 나는 외쳤다. 우리의 멋진 수자 언니가 바바리맨을 향해 ”그 작은 걸 가지고!“라고 일갈할 때, 언니 멋져! 실은 등 뒤에서 찔찔 짜며 속으로만 외쳤던 것이나, 호령이 어찌나 쩌렁쩌렁했던지 내장이며 뇌수를 온통 뒤집어놓았던 거다. 수자 언니는 그토록 든든했다.


게다가 이 언니가 오지랖 휘날리며 나선 이유가 또 멋지다. ‘나를 구하기 위해 연탄집게를 들었던 아줌마 빚을 갚아야 할 때가 지금이다.’ 라는 각성 때문이었다는 거다. 잘못한 것 하나 없이 울음이 터지고, 그래서 더 마음을 다치고, 다치고도 욕을 먹고, 말 못 하고 몰래 울어야 했던 가시나들을 위해 기꺼이 아줌마가 된 거다. 가시나였던 나를 위해, 연탄집게를 휘둘러주었던 아줌마를 위해. 뻔뻔하고 촌스럽고 억센 아줌마가.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보다 택시기사가 첫 손님이 여자면 하루 영업이 재수 없다는 인식과 싸우는 것이 혁명’이라고 말하는 우리들의 멋진 언니. 시를 쓰고 글을 쓰며 당신들도 말을 하고 글을 쓰라고 한다. 이제는 말할 때가 되었다고, 누군가는 글을 써야 한다고.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가시나, 아줌마, 여자로만 살아왔으니 이제 ‘남은 삶은 사람으로 살다 가고 싶다.’고 한다. 언니의 바람이 곧 우리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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