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를 읽다 쓰다
책갈피가 필요없던 때도 있는데, 어릴 땐 거의 그랬다. 손가락 하나면 충분했다. 다 읽을 때까지 내려놓지 않았으니까. 뭘 먹을 땐 수저를 들지 않은 손으로 들면 되고, 누가 부르면 손가락을 끼워 들고 있으면 된다. 화장실 갈 땐 엎어두거나 옆에 있는 아무거나 얹어두면 되고.
그러던 인간이 수많은 책갈피와 메모지와 연필과 스티커를 두고도 매번 찾는다. 매번 어디로 사라지고 없는고 하니, 물론, 어느 책엔가 있다. 읽다 못 읽고 덮어둔 수많은 책들 사이 어디엔가.
불행중 다행은 몇 주를 넘기는 책은 거의 없다는 거다. 시작만 해둔 책이 아무리 많다 해도 서른 권을 넘지는 않는 게 확실하다. 일부러 끊어 읽는 시집이나 선집이 아니라면 어떻게든 한두 달 안에는 끝을 내니까.
책갈피나 대신할 무언가를 품고 달을 넘기는 책은 프루스트 정도가 유일한데 어쩌다 발굴될 때가 있다. 그러니까 어느날 책 하나를 들고는, 어라? 하는 때가. 읽던 책임은 분명한데 어디까지였는지 알 수 없는 때가. 책갈피가 꽂힌 페이지의 어느 문장을 보아도 주인공의 이름조차 알아보기 힘든 때가. 조급한 손가락으로 뒤져보아도 틀림없이 기억나는 건 첫 문장(혹은 첫 단락, 첫 장) 뿐일 때가.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까. 나는 마음 아니, 머리를 비운다. 그냥 처음부터 읽는다는 얘기다. 3부작 책의 1부를 읽고 나서야 알았다. 여기까지였다는 걸. 1부 첫 장과 마지막 장 마지막 문장이 틀림없이 기억났다. 그때의 충격도.
심장이 내려앉는 ‘쿵’ 소리가 귀에 들릴 때가 있다. 아주 느린 속도로 여전히 떨어지는 중인 듯 무게가 계속 느껴질 때가 있다. 멈췄던 책을 왜 오랫동안 다시 들지 않았을까. 이것 때문이었다. 심장이 무거웠다, 오래.
또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두 번째라 무뎌졌다는 건 아니고, 이번에는 호기심이 이겼다. 뒷이야기가 궁금했다.
한데 뒷이야기가 아니었다. 아니 맞지만 다른 이야기다. 아니다, 다 거짓말이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거짓말. 거짓말까지도 거짓말.
클라우스 혹은 루카스. 혹은 둘 다거나 다 아니거나. 누군지 누구도 알 수 없는 화자는 종이와 연필을 산다. 전쟁 중이라도, 먹을 게 없어도, 돈이 없어도, 말과 글을 몰라도. 어떻게든 말과 글을 배우고 종이와 연필을 구해서 쓴다. 살아남기 위한 모든 것들. 배움과 연습과 말과 글. 다 거짓말.
심장이 아주 느린 속도로 떨어지고 귀에서 소리가 들린다. 나는 1부 <비밀 노트>만 세 번 읽었고 두 번은 잊었다. 이젠 잊을 수 없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