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힌 데 속시원히 뚫어 드립니다”

<조용한 생활>을 보다 쓰다

by 시린

“사람 불러.”

날마다 고장이다. 고쳐야 할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다. 어디가 어떻게 문제인지 알 수 없으니 쉽지 않다. 사람을 불러야 한다.


부를 사람이 없거나 문제가 간단해 보일 때는 내가 ‘사람’이 된다. 더러 자신감 넘치기도 한다. 이 정도 쯤이야. (여기서 ‘남자들은 왜 길을 물어보지 않는가’로 새고 싶은 마음을 눌러앉힌다.)


영화 <조용한 생활>의 아버지가 있다. 그는 막힌 하수구를 붙들고 씨름하다가 깊은 절망에 빠진다. 우울의 하수구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우적대다 해외로 도피한다. 아내도 남편을 돌보기 위해 같이 가고 집엔 세 남매만 남는다.


그가 영화에 등장하는 건 그걸로 끝이다. 몇 번 통화를 하는 장면이 있지만 아버지 혹은 등장인물로서의 역할은 더이상 없다. 문제를 버려두고 도피한 가장이라는 게 그의 유일한 정체성이다.


그는 소설가다. 하수구니 수도관이니 하는 건 전혀 모른다. 그런 그가 왜 사람을 부르지 않고 직접 ‘사람’의 역할을 하려 했는지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사실 그에게는 훨씬 크고 무거운 문제가 있다. 장남에게 지체장애가 있는 것이다. 아들 이요가 병을 안고 태어나면서부터 그의 인생은 분화구 안의 섬이 되어버렸다. 선택과 갈등과 절망이 뜨겁고 끈끈하게 엉겨 그를 포위한 채 부글부글 끓었다.


포위된 섬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죽거나 날아가는 것 뿐이다. 그리하여 비행기에 몸을 실었으나 죄책감은 그를 놓지 않는다. 섬에는 아이들이 남아 있다. 결국 멀리 가지도 못하고 땅에 매인 풍선처럼 허공을 빙빙 돈다.


아이들은 뭘 하고 있을까? 영화의 서사는 이요와 여동생 마짱이 쓴다. 마짱은 장애인 오빠를 돌보고, 이요는 수영을 배우고 작곡을 한다. 날마다 문제가 발생하지만 조금씩 고쳐지거나 미뤄지고, 음악과 바람이 조용히 흐르는 순간이 온다. 그들의 <조용한 생활>을 비추며 영화는 끝난다.


이 이야기는 익숙하다. 원작 소설을 쓴 오에 겐자부로의 자전적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감독인 이타미 주조와 오에 겐자부로는 친구면서 동서 사이다. 이요의 모델인 오에 히카리의 어머니는 이타미 주조의 여동생이다.


소설에서 오에, 즉 아버지의 역할은 영화에 나온 것과 비슷하다. 미미하며 이렇다 할 일을 하지 않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내내 붙들고 있던 막힌 하수구도 소설에는 없다. 감독이 시나리오를 쓸 때 배경과 인물상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장면일 것이다.


아버지는 고장난 데를 고쳐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들의 병은 고칠 수 없다. 그는 스스로 ‘사람’이 되고자 했지만 애초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어쩌면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요에게는 문제가 없다. 그는 새소리를 듣고, 음악을 작곡한다. “조용한 생활은 우리의 이야기니까요”라고 말한다. 그의 세상은 조용한 모양이다. 그리고 새소리와 음악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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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이요는 온화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돌아다보았다. “쾨헬번호 311 피아노 소나타입니다. 이제 괜찮아요. 뒤쪽에는 어려운 부분이 없으니까 전혀 걱정 없어요!”

-<조용한 생활>중에서-


“막힌 데 속시원히 뚫어 드립니다” 땅을 보고 걷다 이런 전단지를 보면,허세인 걸 알면서도 씩 웃는다. 눈앞에 ‘사람’이 짠하고 나타나 이렇게 말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