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에르보, <내 얘기를 들어주세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돈? 장수? 명예와 성공? 혹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원만한 관계?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암만 가져다 붙여보아도 "유일한 것"은 쉽게 결정할 수 없다. 덕분에 이것은 영원히 답할 수 없는 불가사의의 질문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안 에르보는 <내 얘기를 들어주세요>(2017, 한울림)에서 작고 단순한 결론을 빚어낸다. 이러한 생각은 형체 없이 부풀수록 끝도 없이 거대해진다는 지혜를 가지고.
주인공 ‘브루’에게는 고양이가 있었다. 그가 키우는 것도 길러진 것도 아닌 이름 없는 길고양이다. 오며가며 서로를 알아보고, 부르면 대답하고 반가워하곤 했던 이 고양이가 어느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브루는 속상함을 금할 길이 없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길을 가는데, 마주치는 사람들이 슬픔의 이유를 묻는다. 곧이곧대로 대답하면 곧 온갖 질책들이 떨어진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한 가족도 아니고, 그냥 길고양이일 뿐이니까.
불평하는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이유가 있다. “아, 나보단 낫네.”, “난 코가 깨진데다 발에는 자갈이 박혔다고!”, “난 굶어죽게 생겼는데! 배가 너무 고프다고!” 조언하는 사람들에게도 이유가 있다. “다른 고양이를 기르면 되지, 나한테 열 마리나 있어!” 브루의 슬픔을 듣고 싶지 않아하는 사람에게도 이유가 있다. “얘야, 난 바빠!” 브루가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제각각의 이유가 있다. 브루는 그 이유들이 적당한 것도 같아서 속상하지만 인정한다. 자신의 이야기보다는 남들의 이야기를 먼저 듣는다.
브루는 꼬부랑 할머니도 만나요.
“아가야, 너한텐 뭐가 있니?”
브루는 말을 시작해요.
“나한텐 고양이가 있었어요.”
하지만 꼬부랑 할머니는 흔들흔들하더니
그만 잠이 들고 말아요.
- <내 얘기를 들어주세요> 중에서.
할머니는 잠이 들고, 팔이 잔뜩 달린 조각상은 세상의 모든 문제를 신경 쓰느라 브루와 대화할 시간이 없다. 굶주린 사람들, 아픈 사람들, 환경 오염과 자연재해… 세상에 있는 중요한 문제들은쉽사리 해결되지 않아 조각상은 달리고 또 달린다. 브루는 조각상의 이야기에 풀이 죽는다. 자신의 문제가 덜 중요한 것이라는 데에 동의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브루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아 한참을 걷다가, 걷다가, 너무 추워 몸이 오그라드는 북극에 도착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개 한 마리를 만난다. 브루는 이 강아지도 자신의 슬픔을 거절할거라 생각한다. ‘길고양이를 잃어버린 건 별 일 아니야. 더 중요한 일이 있겠지.’ 하지만 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거야 그렇겠지. 그래도 네 고양이에 대해 얘기해 줘.
그럼 그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널리 퍼져 나갈 거야.
다정한 너와 길들여지지 않은 고양이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말이야.”
개가 말해요.
- <내 얘기를 들어주세요> 중에서.
그리하여 드디어 브루는 고양이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개의 말은 다정하다. 세상에 중요한 일들이 있는 것과는 별개로, 네 감정은 중요하고 그 감정은 나눌만한 가치가 있다고 확신하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작은 것이 중요하다”는 단순한 결론이 나지는 않는다.
브루가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었다가 거부당한 사람들에게는 모두 각자의 사정이 있었다. 각기 바쁘고, 개중에는 끔찍한 ‘문제’도 있었다.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당장은 불가능한 거대한 문제들. 그것들보다 브루의 이야기가 더 중요할까? 반대로, 브루의 이야기보다 그것들이 더 중요할까? 이러한 질문은 영원히 답할 수 없다. 하지만 무엇이 이런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도록 도울지는 생각해볼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거대한 자금이나 활동들이 있어야만 한다고 여긴다. 그것이 없이는 시작조차 못한다는 마음도 든다. 시작하기가 너무 힘들어 어떤 일도 바뀔 수 없을 것 같다고 느낀다. 하지만 모든 것의 시작은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나누고, 진심으로 공감하거나 알아차리는 경험이다. 공감하거나 알아차리지 않으면 거대한 자금도, 활동도, 추진도 불가능하다.
개는 브루의 속상함이 이야기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야기가 퍼져나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고 ‘이해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나의 감정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이해받을 수 있다면? 그 순간부터 그의 마음속에는 타인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생겨날 것이다. 안 에르보의 다정한 이야기는 이 공간에 있다.
그 공간엔 무엇이든 담길 수 있다. 브루의 슬픔은 조각상의 마음에 담기고, 조각상의 슬픔은 브루의 마음에 담긴다. 마음에 담긴 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으니 이런 연결점들이야말로 사람을 바꾸고, 관계를 바꾼다. 가끔은 돌아가는 길이 더욱 빠르다는 말처럼,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일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일단 이 '가장'이라는 말부터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무엇이든 유일이 되는 순간 우리는 그 외의 것을 덜 중요한 것으로 치부하게 되어버린다. 한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도 매 순간 바뀐다. 어느 때엔 가족이 가장 중요했다가, 어느 때엔 가족을 도울 수 있는 돈이 가장 중요했다가, 어느 때엔 친구들과의 여가시간이 너무 그리워 모든 우선순위를 제쳐버릴 수도 있고, 가치관이 바뀌는 순간 유일했던 것이 그저 흔한 이유 중 하나로 바뀌어버릴 수 있다. 그것들이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해 절망하는 것보다는, 매번 바뀌는 것을 유일이라 칭하고 허덕이는 것보다는, 나에게 중요한 것들은 단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세상은 복잡하고, 사람들이 짊어진 아픔과 의무 같은 것들도 참으로 복잡하다. 하나만 보고 매달리기도 지친다. 하나만 보고 매달리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하지만 개와 브루의 대화가 말하듯, 우리는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들으며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결국 타인을 알아가게 돕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누가 어떤 행복을 느끼는지, 어떤 슬픔을 느끼는지, 그러한 감정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