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중몽(夢中夢), 시뮬레이션 속의 시뮬레이션

시뮬레이션의 끝은 어디인가

by 새벽당직일기

영화 <인셉션>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관객의 시선은 팽이에 고정된다.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팽이가 멈추지 않는다면 그곳은 꿈이고, 멈춘다면 현실이다. 이 아찔한 '현실 검증'의 딜레마는 수백 년 전 소설 <구운몽>에서 성진 스님이 겪었던 장대한 인생 드라마와도 겹쳐진다. 하룻밤 꿈속에서 평생의 부귀영화를 누린 그에게, 꿈과 현실의 경계는 과연 명확했을까.


21세기, 우리는 이 오래된 철학적 질문을 '시뮬레이션 우주론'이라는 과학의 언어로 다시 쓰고 있다. 만약 우리가 사는 세상이 누군가의 컴퓨터 속 가상현실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만든 AI가 또 다른 가상 우주를 창조한다면? 이 세계는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무한한 계단일까, 아니면 어딘가 분명한 끝이 존재할까.


무한의 층계와 뫼비우스의 띠

우리의 상식은 늘 직선을 그린다. '진짜 현실'인 창조주가 있고, 그 아래 피조물이 있다는 계급적 구조다. 하지만 시뮬레이션 기술이 극한으로 발달한다면 이 직선은 원으로 구부러질지 모른다.
우리가 만든 시뮬레이션 속 문명이 눈부시게 진화하여 우리 우주와 물리 법칙이 똑같은 가상 세계를 또다시 만들어낸다고 가정해보자. 그 안의 지적 생명체가 다시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이 과정이 수만 번 반복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까마득한 하위 세계의 시뮬레이션이 최초의 상위 세계, 즉 '우리의 우주'를 완벽하게 재현해내는 지점이 온다.
이때 인과율은 꼬리를 문 뱀처럼 하나로 이어진다. 에셔의 판화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그리는 두 손처럼, 창조주가 피조물을 만들고 그 피조물이 다시 창조주를 시뮬레이션하는 기묘한 '순환 고리'가 완성되는 것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의 구분이 사라진 이 세계에서는 누가 진짜이고 가짜인지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 시작도 끝도 없는 거대한 회전목마만 있을 뿐이다.


모든 꿈에는 비용이 따른다

하지만 이 완벽해 보이는 순환의 꿈은 냉혹한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바로 '비용'의 문제다.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를 떠올려보자. 노트북을 오래 쓰면 뜨거워진다. 물리학자 롤프 란다우어는 정보를 처리하고 지우는 과정에서 반드시 열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것이 우주를 지배하는 엔트로피 법칙이다. 만약 우주가 무한히 겹쳐진 시뮬레이션이라면, 그 천문학적인 연산 과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 때문에 시스템은 진작에 과부하로 타버렸을 것이다.
게다가 '해상도'의 문제도 있다. 큰 상자 안에 그보다 더 큰 상자를 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컴퓨터는 시뮬레이션 당하는 세상보다 더 복잡하고 용량이 커야 한다. 단계가 내려갈수록 세상은 단순해지고 해상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에너지를 태워야만 돌아가는 세상에서 '영원한 순환'은 그저 낭만적인 환상일 뿐, 언젠가는 멈춰야 할 운명이다.


사라지지 않는 0과 1

논리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 벽을 허물어주는 것은 고전 물리학이 아닌 '양자 역학'이다. 양자 컴퓨터의 세계에는 '가역성(Reversibility)'이라는 독특한 성질이 존재한다.
양자의 세계에서 정보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0과 1을 지우고 덮어쓰는 것이 아니라, 정보의 형태만 바꿀 뿐이다. 정보를 지우지 않으니 열이 발생하지 않고, 열이 나지 않으니 에너지가 닳지 않는다. 이것이 양자 가역 계산이 보여주는 가능성이다.
만약 우리 우주가 정보를 태워 없애는 엔진이 아니라, 정보를 영구적으로 보존하며 순환시키는 거대한 양자 컴퓨터라면 어떨까? 정보 손실이 없으니 하위 세계가 상위 세계만큼 복잡할 수 있고, 엔트로피 증가 없이 무한히 루프를 도는 것도 가능해진다.


시공간에 새겨진 오류 수정 코드

이 가설을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이론물리학자 제임스 게이츠(S. James Gates)의 발견이다. 그는 초끈이론을 연구하던 중, 우주의 본질을 설명하는 방정식 안에서 컴퓨터 통신에 쓰이는 '오류 수정 코드(Error-Correcting Codes)'와 정확히 일치하는 수학적 패턴을 찾아냈다.
오류 수정 코드는 잡음이 많은 채널에서 데이터를 전송할 때 정보가 깨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알고리즘이다. 도대체 왜, 순수한 자연의 법칙 속에 웹 브라우저나 통신 위성에서나 쓰일 법한 인위적인 코드가 숨겨져 있을까?
이는 우리 우주가 거대한 시뮬레이션이며, 물리 법칙(빛의 속도, 중력 상수 등)이 바로 이 시스템이 붕괴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보정 장치'임을 시사한다. 무한한 순환 속에서도 세상이 깨지거나 오류가 나지 않고 유지되는 이유는, 우주 자체가 강력한 자기 수정 기능을 갖춘 정보 시스템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멈추지 않는 질문

이처럼 양자 역학이 보증하듯 정보는 결코 소멸하지 않으며, 오류 수정 코드는 우리의 존재를 지킨다. 어쩌면 우리는 삭제되지 않는 거대한 우주의 도서관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구운몽>의 성진은 꿈에서 깨어났지만, 우리는 아직 꿈속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모호함이야말로 인류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드는 동력이다.
벽인 줄 알았던 곳에 문이 있고, 끝인 줄 알았던 곳에 새로운 시작이 있다. 시뮬레이션의 층계가 어디까지 이어져 있든, 꼬리를 문 뱀처럼 영원히 순환하든, 우리는 그 끝을 향해 계속해서 질문을 던질 것이다.


그 질문이 멈추지 않는 한, 이 거대한 시뮬레이션은 우리를 위해 계속될 것이다.

마치 영원히 멈추지 않는 팽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