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짠!”
“우와, 예쁘다! 그런데 너무 짧은 거 아니야?”
“응, 일부러 짧게 잘랐어요.”
“갑자기 왜 그렇게 잘랐어? 한층 어려 보이고 이쁘긴 하네.”
“25cm 잘라서 ‘어·머·나’에 보내느라.”
“어·머·나? 그게 뭐야?”
“소아암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거.”
“어떻게?”
“머리카락을 잘라 보내면 가발로 만들 수 있나 봐요.”
“그래? 그런 게 있었구나. 잘했다, 우리 공주.”
둘째 딸의 페이스톡을 끊고 나서 무심결에 머리카락을 만져 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내 머리카락은 가늘고 숱이 적은 데다 반곱슬이다. 학창 시절엔 찰랑거리는 직모를 가진 친구가 부럽기도 했다. 어린 시절, 엄마는 언니의 풍성한 머리숱을 종종 쳐 주셨다. 그러나 한 자매인데도 난 유난히 숱이 적었다.
‘한 줌도 안 되는 내 머리카락이 도움이 될까?’ 문득 궁금해져 「어·머·나」를 검색했더니 『대한민국사회공헌재단국제협력개발협회』에서 하는 어머나운동으로 “머리는 짧게, 나누는 마음은 길게.”라는 슬로우건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나’는 ‘어린 암환자를 위한 머리카락 나눔 운동’의 줄임말이다. 어린이 사망 1위가 소아암이고 하루에 4명의 어린이 암환자가 발생한다고 한다. ‘어·머·나’ 운동은 일반인에게 25cm 정도의 머리카락 30가닥 이상을 기부받아 매년 1,500여 명씩 발생하고 있는 20세 미만 어린 암환자의 심리적 치유를 돕기 위해 맞춤형 가발을 무상으로 제공한다.
건강한 사람은 하루에 약 50~100개의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빠진다고 한다. 그런 머리카락을 모아 보내도 된다기에 머리를 길러 보기로 했다.
매일 아침 정성껏 머리를 감고, 펌도 염색도 하지 않았다. 미용실에 갈 일도 없었다. 여름엔 묶어서 올리고, 겨울엔 풀어서 손가락으로 둘둘 말아 놓으면 자연스럽게 웨이브가 생겨서 손질도 편하고, 돈도 들지 않아 ‘일석이조’다. 예전엔 미용실 가는 곳마다 내 얼굴형엔 쇼트커트가 어울린다며 늘 짧게 잘라서 한 달에 한 번은 미용실을 가야 했고, 매일 드라이기로 뿌리를 띄우기 위해 헤어롤러로 손질하려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무척 번거로웠다. 그러나 2년 동안 미용실에 가지 않으니 아주 좋았다.
또래보다 흰머리가 적은 편이고 잦은 펌으로 두피를 혹사시켜 쉬게 해 주고, 나이 듦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싶어 염색을 하지 않았다. 어느 여름날,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1년에 한두 번 있는 참으로 반가운 자리였다. 모두 까만 머리로 젊음을 붙잡고 있었지만, 얼굴의 주름은 세월을 숨기지 못했다. 공직에 있던 한 친구가 반가워하며 현직에 있을 땐 염색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나이 들면 흰머리도 주름도 생기는 게 당연하지 않냐고 했더니 그래도 그렇지 않다며 집에 가면 꼭 하라고 당부한다. 집에 돌아와서도 친구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너무 편한 것만 생각하고 남을 배려하지 않았나 싶어 아이들이 좋아한다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펌이나 염색을 해도 ‘어·머·나’에 보낼 수 있다고 해서 염색만 하기로 했다.
막상 시작은 했는데 25cm를 기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머리가 길어질수록 감고 말리는 게 번거로웠고, 빠지는 머리카락도 많았다. ‘그냥 자를까?’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소아암 아이들이 눈앞에 스쳐 가 조금만 참자고 다짐한다. 유튜브에서 소아암 어린이가 울며 호소하는 영상을 보았는데 마음이 먹먹하고 눈물이 났다. 운동신경이 둔한 손자를 보며 속상했던 기억이 스쳤지만 건강하게 자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해 8월 말, 교단에서 정년퇴임하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했다. 숱이 적은 꽁지머리는 어느새 허리를 향해 달리고 있다. 예약해 둔 미용실로 가자 원장님이 반갑게 맞았다.
“오늘은 어떻게 해 드릴까요?”
“어·머·나에 보낼 거라서, 25cm 정도 넉넉하게 잘라 주세요.”
“어·머·나요? 그게 뭐예요?”
“어린 암환자를 위한 머리카락 나눔이에요. 소아암 아이들에게 가발을 만들어 준대요.”
“와, 그런 것도 있네요. 신경 써서 잘 잘라 드릴게요.” 원장님은 내 머리를 고무줄로 단단히 묶고, 삭둑삭둑 잘랐다. 고무줄에 묶인 머리카락 한 줌이 손에 들리자, 아이의 머리 위에서 예쁜 가발로 다시 태어날 걸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요즘 젊은이들의 길고 윤기 있는 머리를 볼 때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저 머리카락이 버려지지 않고 어·머·나에 보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의외로 미용실 원장들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전 세계 80억 인구 중에서 병과 싸우는 그 아이들도 우리 모두처럼 소중한 생명이다. 어·머·나가 널리 알려져 많은 소아암 아이들에게 자존감을 회복시키는 행복한 머리카락 나눔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 후에도 자르고 싶은 유혹을 참으며 머리를 길렀고, 올봄에 두 번째 기부를 했다. 오늘도 ‘어·머·나’를 생각하며 머리를 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