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화장실의 거미가 떠나지 않는다. 벌써 삼일이나 됐는데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세면대에서 한 뼘 위, 왼쪽으로 두 마디. 내가 씻고, 떠나고, 다시 돌아오는 그 모든 과정에 거미는 그 자리에 그대로 가만히 처음 모습과 달라진 점 없이 있다. 너도 여기서 살래? 그럼 월세를 내. 말을 걸어봐도 대답이 없다. 그 침묵이 썩 괜찮아 거미를 그대로 둔다.
거미는 죽이는 거 아니래. 손님이래. 언젠가 들은 적 있는 말이었다. 저 거미가 내 손님이라면 차라도 대접해야 할까. 거미를 가만히 바라본다. 너무 작은 얼굴이라 눈을 마주할 수 없다. 차는 없고, 술 마실래?
화장실 문을 열어둔 채 냉장고에서 술병을 꺼냈다. 단칸방 원룸은 부엌과 방의 구분이 없어 대강 식탁으로 쓰는 곳에 앉으면 화장실이 그대로 보였다. 화장실 어딘가 있을 거미와 작게 짠. 알코올의 쓴맛이 훅 올라온다. 삶을 담아낸 맛이라는데 내 삶은 여전히 발효가 덜 되어선지 그 맛을 잘 모르겠다. 다만 홧홧한 느낌이 아직 내게 식도가 있음을 알려줄 뿐이다. 피가 혈관을 타고 하강한다. 이제까지의 삶이 그러하듯 하수구로 빨려 나가는 물처럼 빙글빙글 떨어진다. 제자리를 맴도는 것 같지만 사실 나는 회오리치며 떨어지고 있던 것일지 모른다. 더 어둡고 더 깜깜한, 영화가 상영되지 않는 영화관 같은 곳으로. 이처럼 몸이 무거울 때 한순간에 몸을 가볍게 만드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다. 그러나 이 공간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공간적 한계도 있으나 건물 벽에 잔뜩 붙은 금지 목록이 먼저 행위를 막는다. 금지, 금지, 적발 즉시 추방, 금지, 하지 말 것. 아, 동물 반입 금지. 함께 적혀있던 문구가 떠오른다. 화장실에 있을 거미를 본다. 반입이 아닌 침입에 대한 묵인은 괜찮은 걸까. 알 수 없다. 괜찮은 걸까? 거미도 답이 없다.
그러니까 어쩌면 저 거미의 삶은 종막을 향해 달려가는 중인 것이 아닐까. 그 결말을 함께 보고싶어 찾아온 건 아닐까. 영화가 결말을 향해가면 관객은 본능적으로 끝이 다가옴을 안다. 그건 시간을 확인하지 않고도 느낄 수 있는 감각이다. 아마 수렵채집 시기부터 무수한 생과 사를 보며 쌓아온 본능적인 감각일 것이다. 죽음에는 향이 없다지만 영화의 끝에는 향이 있다. 다 먹은 팝콘, 쪼르륵 공기만 올라오는 콜라, 슬슬 일어날 준비를 하는 부스럭거림. 작은 부산스러움이 서로 간에 공유된다. 저 거미는 길고 지루한 누구도 보길 원치 않던 영화의 주연 혹은 관객일지도 모른다. 자신만이 오롯이 겪어내야 하는 편집 없는 영상. 한 번도 바란 적 없는 카메라와 끝내 켜지지 않는 조명.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으나 영화관에서 그러면 안 된다는 규칙이 몸을 누른다. 그러니 영화의 끝을 가장 바라는 이는 아마 감독일 것이다.
그러니까 거미야 네 영화의 크레딧에는 누구의 이름이 올라오지?
다음 날 사 일째 되는 날 아침 화장실 문을 열자 거미가 없는 벽과 마주친다. 짧은 크로스오버가 끝났다. 이제 이 자리에 배우는 한 명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