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언어란 언제나 마법적 힘을 가져, 듣는이에 따라 다른 효과를 내고는 한다. 이를 청해라 부르는데, 들을 청에 해독할 해 자를 쓴다. 즉, 듣는이가 어떻게 해석하는가, 그것이 말의 효과를 만들어낸다.
아직 지하철이란 것이 지하로만 다닐 적의 일이다. 지하철에 안에는 슈크림 빵을 파는 잡상인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창밖으로 우주 같은 복도가 후르륵 지나가고 덜컹거리는 기계 안에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지하철은 모든 인생이 그러하듯 끝에 도달해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지하철이 멈췄을 때, 종착역-미량역-을 알리는 음성이 들린 뒤, 짧게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위쪽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늘 들리던 말이 갑작스레 1.5배 빠른 속도로 사람들의 귀를 스쳤다.
발 빠진 쥐, 발 빠진 쥐. 이 역은-
앞서 말했듯이 언어란 듣는이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른 마법을 일으키고는 한다. 그리고 그날, 지하철 내 사람들은 늘 들리던 말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해했다. 청해가 일어난 것이다. 동시에 이는 세계에 대한 오독이었다. 하여 언어는 반쪽짜리 마법을 부렸다. 사람들이 지하철을 내리며 발 빠짐을 주의하는 대신, 지하철과 역 사이 공간에 발이 빠진 쥐들이 등장했다.
여기까지 들은 나는 그래서 나한테 부탁하겠다는 것이 무엇인지 독촉했다. 슬쩍 본 시계의 분침은 이미 꽤 많이 흘러가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 후 상대는 이야기가 곧 끝나니 조금만 더 들어보라고 말했다.
지하철역은 이내 아수라장이 되었다. 쥐를 처음 본 일부 사람을 제외하고는 너나 할 것 없이 비명을 질러댔다. 비명에 놀란 쥐들은 더욱 허둥거리며 자신의 발을 빼려고 했다. 개판을 넘어선 쥐판이었다. 그리고 그때, 드디어 쥐들의 발이 빠졌다. 들어서 알겠지만 ‘쥐들의 발이 빠졌다’는 중의적 문장이다. 아마 대다수는 역과 지하철 사이에 빠졌던 발을 빼낸 것으로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일부 다른 이해자들, 이를테면 쥐의 다리에서 발이 빠져버린 것으로 이해할 일부 사람으로 인해 한 마리의 쥐가 발을 잃었다. 한쪽 발을 잃은 쥐는 허둥대며 다른 쥐들을 따라 지하철역의 구석진 틈으로 사라져버렸다. 홀로 남은 발 한쪽만이 지하철 선로에 떨어졌다.
이쯤에서 나는 상대가 내게 무엇을 부탁하려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건 무척 어렵고, 슬픈, 존재론적 의문에서 비롯된 갈망일 것이다. 언어가 갈망과 맞물려 생긴 부탁은 내 마법의 원천. 나는 성공 가능성을 점치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나는 빠진 발. 당신에게 내 나머지 몸을 찾아주기를 부탁한다.